올해는 정초가 마치 세밑처럼 을씨년스럽다. 사람들이 신년결의를 다지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등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넘치는 게 정초세태인데, 올해는 지난 세밑에 겪은 큰 충격 탓인지 착 가라앉았다. 해가 바뀌기 이틀 전에 미주 한인사회 역사상 최악의 버스사고가 바로 서북미 뒤안길에서 일어났고, 그 후유증이 해가 바뀐 뒤에도 이어지고 있다.
사고버스는 지난달 22일 밴쿠버BC를 떠나 시애틀 지역 예약손님들을 픽업한 후 8박9일의 크리스마스 투어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 그랜드 캐년, 라스베이거스 등 서부지역 관광명소들을 순례하고 아이다호 주 보이지에서 마지막 1박 후 귀환 중이던 30일 오전 동부 오리건 주의 빙판 길에서 미끄러져 가드레일을 깔아뭉개고 200야드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불과 10여초 사이에 47명의 운명이 갈렸다. 크리스마스 투어가 끝나기 전에 9명이 불귀의 천국행 버스로 갈아탔다. 그 중엔 11세 조기유학생 소녀도, 패기의 크리스천 대학생도 있다. 사위와 며느리의 효도로 양가 사돈 4명이 함께 관광길에 나섰다가 그중 3명이 비운을 맞기도 했다. 한인부인을 위해 동행했던 50대 후반의 미국인 남편도 화를 당했다.
하지만 이런 참사에도 기적이 있었다. 린우드의 조현숙 할머니는 이번 사고에서 머리카락 하나 상하지 않았다. 사망자를 제외한 탑승자 전원이 부상자로 분류됐지만 조 할머니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멀쩡했다. 병원에서도 전혀 이상이 없는 것으로 검진돼 펜들턴의 적십자사 구호센터에서 이틀간 안정을 취한 후 2일 당국이 주선해준 차편으로 귀가했다.
교회권사인 조 할머니는 주일아침이었던 사고당시 신발을 벗고 책상다리로 앉아 기도 중이었단다. 버스가 뒹굴며 머리가 천정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후 깨어나 보니 자신이 버스 밖 눈밭에서 마치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 꿇고 엎드려 있더란다. 깨진 창문으로 튕겨져 나온 것이다. 얼굴이 눈과 흙으로 뒤범벅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안경은 귀에 걸려 있었다.
조 할머니는 신발도 없이 눈 덮인 비탈길을 엉겁결에 기어 올라갔다. 구조대원들이 70대 중반의 그녀를 담요로 감싼 후 앰뷸런스에 태워 인근 템플턴 병원으로 후송했다. 조 할머니는 탑승자들 가운데 맨 먼저 후송됐기 때문에 사고버스 안의 참상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일행 중 9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허망했다고 덧붙였다.
펜들턴에서 불안과 외로움에 떨던 조 할머니에게 두 번째 기적이 찾아왔다. 전혀 예상 못한 딸 또래의 젊은 동포여인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조 할머니를 병원과 적십자 구호소 등지로 안내하며 통역자로 도와줬고 정부당국으로부터 250달러짜리 긴급구조 카드를 받아 월마트에서 신발과 옷가지를 사줬다. 자기 집에 데리고 가 김치찌개까지 끓여 대접했다.
외상은 없어도 심적 충격이 컸던지 조 할머니는 귀가 후 친지들에게 “한치 앞을 모른다” “살았다고 할 수 없다”고 되풀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기적은 있다고 강조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박살나는 버스 안에서 반짝 들어내 눈 위에 살짝 놔둔 것 같다”고 했다. 착한 동포를 오지에서 만난 것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라며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했다.
맞다. 한치 앞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살만하다. 한치 앞의 신명나는 일을 기대하거나 상상해보자. 가령 올해 김정은이 북한주민을 먹여살려달라며 남한에 투항한다던가, 올 가을 워싱턴대학에 한인 지망생들이 싹쓸이 합격한다던가, 개솔린 값이 2달러 밑으로 떨어진다는 따위다. 상상은 자유고 세금도 붙지 않는다. 기적이 조 할머니에게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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