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두 시간, 기차로 한 시간, 차로는 한시간 반이 걸리는 곳. 천안에 부모님이 사신다. 나는 지하철을 탄다. 운전을 하는 것보다 편하고, 집 앞이 바로 지하철역이니 기차역에서 내려 버스나 택시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 텅 빈 진공 같은 시간이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시간이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약속 장소는 압구정역 현대 백화점 맞은편 스타벅스. 십여 년 전에도 같은 친구를 만났던 장소다. 그 당시 그 친구가 30분쯤 늦게 나와서 왜 그렇게 늦었냐며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었다.
그리고 오늘 난 30분 일찍 그곳에 도착해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서 창밖을 내다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10여년 전과 조금 달라진 주변 풍경들. 묻혀있던 기억들이 공간의 흔적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친구가 좀 더 늦게 와도 상관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내겐 더 이상 짜증나는 일이 아니다.
해가 바뀌면 새해 계획을 세워보곤 하는데, 그 계획 중 하나는 적어도 100권의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읽은 책 리스트를 만드는 일이다. 어느 해는 채우기도 하고, 어떤 해는 훨씬 못 미치기도 한다. 읽고 싶은 책을 사오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오면 빨리 읽고 싶어진다. 빨리 100권을 채우고 싶은 욕심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깊이 사색하며 읽어야할 책들도 그저 ‘읽어’ 버린다. 그렇게 빨리 읽어버리면, 행간의 의미를 생각하거나, 저자의 생각에 비추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어렵다. 단순한 앎을 위한 책읽기로 끝나는 것이다.
요즘엔 더 빨리 읽을 수 있어도 몇 챕터를 읽고 나면 일부러 책을 덮는다. 아니면 책 읽는 중간 중간 메모를 한다거나 연상되는 다른 것들을 찾아보는 등 책장을 좀 더 천천히 넘긴다. 책 읽는 동안에 가지는 그런 빈틈들 사이로 내 생각이 조금씩 차오름을 느낀다.
깊이 있는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한 텅 빈 시간과 공간에서 팽창한다. 무료해서 미칠 것 같은 순간에 하품하듯, 기지개를 펴듯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조금 천천히 행하는 것, 조금 느리게 가는 것, 시간의 틈을 갖는 것을 불안해하던 버릇을 가라앉히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어떤 일을 처리해야 하고, 빨리 어딘가를 가야하고, 빨리 밥을 먹고, 빨리 답을 알아내야 했던 하루하루가 특별한 일 없는 하루, 느리게 가는 하루로 변했다.
느리게 걸어보면 내 눈에 더 많은 것들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밥을 꼭꼭 씹어 음식의 맛을 음미하며 먹는 것과 대충 씹어 넘기는 것의 차이, 걷는 여행과 자동차 여행의 차이, 5분 만에 끓인 라면을 먹는 것과 한두시간 정성스럽게 차린 한식을 먹는 것의 차이, 영화로 보는 안나 까레리나와 책으로 읽는 안나 까레리나의 차이.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가는 삶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속도만을 생각하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것을 이루려고만 하는 삶은 분명 많은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놓친 ‘무엇’은 우리 삶을 좀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해주는 것들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정신없이 보낸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혹여 시간에 떠밀려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김진아 광고전략가 쿠알라룸푸르 Young & Rubi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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