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매틱 성공회 주교였던 필립 윅스와 간호사였던 준은 56년간 동고동락했다. 하지만 준이 치매에 걸린 후 그녀의 기억에서 윅스는 완전히 지워졌다.
필립 윅스는 너무도 익숙한‘타인’과 생활한다. 지난 56년간 그림자처럼 그의 곁을 지켜온 아내 준은 이제 남편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윅스도 아내가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윅스와 준은 닭살 돋을 만큼 금슬이 좋은‘잉꼬부부’였다. 그러나 준에게 갑작스런 치매증세가 찾아들면서 윅스는 그녀의 기억에서 통째로 지워졌다. 아주 가끔씩 정신이 맑아지면 준은 남편에게 몸을 굽혀 키스를 한다. 그러나 반짝하는 각성의 순간은 번갯불처럼 지나간다. 다시 기억의 끈을 놓친 그녀는 혼란스런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며“누구세요?”라고 묻곤 한다.
수십년 동고동락한‘나의 반쪽’
어느날 갑자기 치매로… 사고로…
‘완전한 타인’이 되어버렸지만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혼인서약 반드시 지킬거야
간호사로 활동했던 준은 빼어난 그림솜씨를 지녔다. 종종 램브란트의 작품과 비교되던 준의 그림은 아직도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의 집에 그대로 걸려 있다. 하지만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그림뿐이다.
카리스매틱 성공회 주교로 목회활동을 이끌던 윅스와 헌신적 간호사였던 준은 56년 전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늘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하자고 혼인서약을 했다.
그 이후 둘은 단 한 번도 그들의 맹세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세월을 따라 포도주처럼 진해지는 사랑 속에서 그들의 세계는 안전하게 느껴졌다.
윅스 부부처럼 배우자에게 극적인 변화가 찾아온다면 남편이나 아내는 어떻게 처신해야 마땅할까? 배우자가 거의 완전한 타인으로 변했을 경우 그 이전에 행했던 혼인서약은 도덕적인 강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
윤리학자들과 성직자, 그리고 뇌손상 전문 연구원들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배우자에게 더 이상 꽃을 선물하지도 못하고, 함께 영화를 보러 갈 수도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면 사랑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윅스는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아내에게 혼인서약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늘 함께 하겠다던 맹세를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각오다.
“아내는 늘 내 옆에 서서 나를 지지해 주었다. 준이 내게 그랬듯, 나도 반세기 전 우리가 약속했던 것처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내 곁에 머물 것이다.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다. 준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난 그녀를 잊지 못한다.”
치매나 알츠하이머, 혹은 심한 뇌손상을 동반한 병으로 남이 되어버린 사람을 향한 사랑은 복잡하다. 이런 관계에선 일편단심의 흔들림 없는 사랑이 표준이 아니다.
지난해 여름, 종교방송 프로그램 ‘700 클럽’을 담당하는 팻 로벗슨 목사는 아내가 알츠하이머 환자인 남성에게 “이혼하고 새로 시작하라”는 투의 조언을 했다가 항의와 비난이 쇄도하자 “내 말 뜻이 잘못 전달됐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알츠하이머 환자는 걸어 다니는 사망자와 같다”는 그의 발언이 가져온 파문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올해 1월 워싱턴포스트 매거진은 심장마비로 인해 뇌손상을 입은 남편과 이혼한 후에도 간병을 계속하고 있는 페이지 멜턴 이비의 이야기를 전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비의 두 번째 남편도 병수발을 적극적으로 거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기사가 나간 뒤 이비는 “가톨릭 신앙의 맥락에서 나는 아직도 첫 남편의 곁에 서있고, 그와 함께 하고 있다”며 “내 뜻을 이해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라며 둘째 남편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렸다. “감동스럽다”는 반응 못지않게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두 남편 모두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 비난도 거셌다.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 그녀는 왜 하느님과 남편 앞에서 행한 서약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웠는지 설명해야 할 것”이라는 가시 돋친 반응도 나왔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사랑법이 있다.
지난 2월 밸런타인스 데이를 겨냥해 개봉한 영화 ‘서약’(The Vow)은 차사고로 머리를 다쳐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와 다시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남편의 실화를 다뤘다.
실존인물인 킴과 크리킷 카펜터 부부는 지난 1993년 대형 차 사고를 당했다. 남편인 킴은 부상에서 회복됐으나 사고 이전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크리킷은 자신이 미혼자라고 생각했다.
킴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보호하고 가르치면서 그녀의 사랑‘을 재획득하는데 성공했다. 크리킷의 상태가 호전된 후 이들은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지켜본 물리치료사 스캇 매드센이 들러리를 선 가운데 결혼 재서약식을 가졌다.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책 ‘서약’에서 킴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혼을 하라는 현실적인 충고를 들었다며 ‘그래야 의료경비를 줄일 수 있다’는 얘기도 자주 들었다고 밝혔다.
배우자가 자동차 사고, 낙상, 뇌졸중, 뇌종양 등의 결과로 익숙한 타인으로 변하면 대부분 이혼이 뒤따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 뇌부상협회의 소비자서비스 디렉터인 그레그 아이오티는 최근에 나온 두 건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은 기혼 환자들의 대다수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펜실베니아 소재 빌라노바 유니버시티의 윤리학자 달렌 포자드 위버는 타인으로 변해버린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해 “상대에게 신실해야 할 의무는 분명 존재하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그 신실성은 대단히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생활에서 배우자에게 신의를 지키는 것은 두 사람을 한데 합쳐준 초심을 기억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자신 앞에 있는 상대에게 반응하고 포용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끝없이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자비를 들여 ‘길고 어두운 밤: 치매와 동행하는 간병인의 여행’이라는 책을 출간한 윅스는 준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 뒤 믿음을 잃기 직전의 상태까지 갔지만 아내에 대한 사랑이 위협을 받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신에 대한 독한 회의도 어느 순간인가 멈춰 섰다.
“하느님은 내가 이전에 미처 몰랐던 성질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 어떻게 이 역경에 대처할지 배웠기에 이제 나는 더 나은 남편이 됐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