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아버지-백인 어머니 사이 하와이서 출생
두 살 때 부모 이혼…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라
인도네시아서 유년기·LA 옥시덴탈 대학 재학
미국 사상 처음으로 흑인 연임 대통령이 탄생했다. 4년 전 미국이 독립선언을 통해 건국한 1776년 이후 232년 만에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에 당선됐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역사에 또 하나의 새 장을 연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에 끌려왔던 흑인들이 1863년 1월1일 노예에서 해방된 지 149년 만이며 흑인 남성이 투표권을 부여받은 1869년으로 따지면 142년 만에 처음 있는 역사적인 대사건이다.
▲출생에서 성장까지
오바마는 1961년 8월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당시 하와이 대학으로 유학 온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 버락 오바마와 캔사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과 사이에서 태어났다.
버락은 아랍어로 ‘축복 받은’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결혼한 지 2년 만에 하버드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면서 아들 곁을 떠났다. 그리고 부모는 오바마가 두 살 때 이혼했다. 오바마가 아버지인 버락 후세인 오바마 시니어를 다시 본 것은 10세 때였고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버락 오바마는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출신의 롤로 소에토로와 재혼하면서 어린 시절 가운데 4년을 인도네시아에서 보냈다.
어머니의 두 번째 결혼도 파경을 맞았다. 어린 시절 ‘배리’로 불렸던 오바마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살고 있던 호놀룰루로 돌아와 유명한 사립학교인 푸나호우 스쿨에 들어가게 됐다. 인류학자인 어머니가 연구를 위해 인도네시아로 다시 가는 바람에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오바마와 학교를 함께 다녔던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정치적인 야심이 가득 찬 학생이었다기보다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있고 아버지는 없었기 때문에 성장환경은 결코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오바마는 자서전인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통해 털어놓았던 것처럼 청소년 시절에 인종문제로 정체성 갈등을 심하게 겪었다. 그가 마약까지 접했다는 것은 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폭풍과도 같은 갈등이 내적으로는 얼마나 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기독교도 신자지만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인 인도네시아에서 유년기를 그리고 다양한 문화배경을 지닌 인종들이 섞여 살고 있는 동서양의 접점으로 불리는 하와이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배웠다.
특히 하와이에서의 청소년기는 문화적인 이해와 관용, 그리고 서로 인정하는 태도를 매우 중시하는 ‘알로하 정신’을 체득하게 만들어 인종과 계층, 성별을 가리지 않고 전 계층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바탕이 됐다.
2차 대전 참전군인 출신의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할머니에게서 누구 못지않은 사랑과 교육을 받은 것도 희망의 싹을 키우며 자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도 여러 인종이 뒤섞여 있다. 오프라 윈프리가 언급했듯이 그들이 한 번 모이면 ‘미니 유엔’이 된다.
오바마는 이런 다문화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좀처럼 하기 힘든 경험을 통해 문화의 충돌로 불리는 세계의 문제를 통합의 가치로 새롭게 풀어낼 수 있는 21세기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키워온 셈이다.
▲대학에서 결혼, 정치입문까지
오바마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LA에 있는 옥시덴탈 대학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사용해 오던 배리라는 이름 대신 버락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은 인문대학인 옥시덴탈 칼리지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야를 넓히기 위해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으로 편입학을 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컬럼비아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잠시 일자리를 잡았다. 그 때 생부가 1982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고 케냐를 방문했다.
오바마는 케냐에서 돌아온 뒤 시카고 흑인거주 지역에서 도시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시카고에서 연봉 1만2,000달러를 받고 공동체 개발운동 프로젝트를 하면서 오바마는 대학에서 배울 수 없었던 소중한 가르침을 얻게 된다.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도시빈민 운동의 경험이 가장 훌륭한 교육이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후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지역 환경뿐만 아니라 국가의 법과 정치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하버드 법대 대학원을 진학, 법학박사를 받고 변호사가 됐다.
하버드 법대 시절에는 법대 학회지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하버드 로 리뷰’의 흑인 최초 편집장이 돼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하버드 법대 시절 시카고에 있는 법률회사에서 연수를 하면서 현재 부인이 된 미셸 로빈슨을 처음 만났다.
▲혜성같이 등장 흑인 최초 대통령 등극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자 여러 곳에서 몰려오는 일자리 제안이 물리치고 시카고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시카고 대학 법대에서 헌법을 가르치면서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처음에는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유권자 등록 운동부터 시작했다.
오바마는 하버드 법대를 졸업한 후 작은 인권 법률회사에 합류하고 유권자 등록 등을 도왔다.
그리고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적인 발을 디디게 됐다.
오바마는 2004년 여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존 케리 민주당 대선 후보 지지 연설을 하기 직전만 하더라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주 상원의원 출신의 정치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2004년 전당대회에서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17분짜리 기조연설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으며 한 순간에 미국의 정치 중심무대로 뛰어올랐다.
그것은 바로 오바마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이었다.
이후 그는 연설이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분위기를 담고 있어 지지자들을 열광시킨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약 스타 정치인이 됐다.
2004년 11월 그는 흑인으로는 미국에서 세 번째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흑인 연임 대통령 탄생
2008년 존 매케인 후보를 물리치고 흑인으로서는 미 역사상 첫 대통령에 올랐다. 4년 전 미국이 독립선언을 통해 건국한 1776년 이후 228년 만에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미국에 끌려왔던 흑인들이 1863년 1월1일 노예에서 해방된 지 145년 만이며 흑인 남성이 투표권을 부여받은 1869년으로 따지면 138년 만에 처음 있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오바마는 집권 초기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국민 건강보험법 통과라는 개가를 올렸다. 공화당 등 보수세력들이 미국의 사회주의화라는 강력한 반대를 이겨낸 최대의 정치적 승리였다. 고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1년여의 의회 진통을 거친 끝에 제정한 최대의 치적으로도 기록된다. 1994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집권 당시 힐러리 클린턴 여사가 유사법을 추진했으나 거센 반대에 밀려 포기했었다.
오바마는 9.11테러의 원흉으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을 파키스탄의 은신처에서 사살하는 업적도 남겼다. 유연한 해외정책을 펼치지만 유사시 미국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양면적 외교정책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처했다는 평가다.
곤두박질치던 미국 경제를 힘겹게 막아내고 느리지만 정상 괘도로 올려놓고 있는 그의 노력이 미국 흑인 대통령의 연임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원동력이 됐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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