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요 인터뷰 - 아시안영화제‘평생공로상’ 수상 정창화 감독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
미국에 쿵푸 열풍 주역
‘죽음의…’ 칸 클래식 올라
“영화의 매직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로잡을 수 있는 ‘매혹’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른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시켜 주는 판타지’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영화는 제 삶의 전부입니다. 제가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영화감독을 또 할 것입니다”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 정창화 감독이 뉴욕 아시아영화제에 이어 태평양 예술운동(구 샌디에고 아시안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태평양 예술운동(PAM) 리앤 김 대표는 지난 3일 열린 시상식에서 “정 감독이 미국에 쿵푸 열풍을 일으킨 주역으로 미국과 유럽에 액션영화를 알린 해외 진출 제1호 한인 감독이라는 점과 2010년 LA 한국영화제(KOFFLA) 창립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영화를 사랑하는 예술인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해 평생공로상을 시상한다”고 밝혔다.
샌디에고를 빛내고 있는 인물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정창화 감독은 어떤 인물일까?
정 감독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년)를 관람한 후부터.
최 감독의 문하생으로 영화제작에 대해 눈을 뜬 정 감독은 1953년 김성민 각본, 신현호 촬영으로 첫 영화인 ‘유혹의 거리’를 연출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영화는 6.25 전쟁 중 포탄을 맞아 전소돼 정 감독 가슴에 품은 첫 자식이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장화홍련전(1956),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노다지(1961), 장희빈(1961) 등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를 연출하면서 한국 영화의 태동기부터 중흥기를 이끌었다.
정 감독의 활동영역은 한국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한국인 최초로 홍콩 영화에 진출한 이후 아시아 작품으론 ‘최초’로 유럽 수출을 성공시켰고 이후 1972년작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미국 영화계에 진출해 아시안으로는 처음으로 박스 오피스 1위에 자신의 작품을 올리는 신화를 썼다.
하지만 정 감독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왕성했던 홍콩 활동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메가폰을 잡은 지 3년 만인 1981년 영화에 회의를 느끼고 가족들과 샌디에고로 이주해 약 30년 동안 영화 한 편 보지 않는 삶을 살았다.
자칫 우리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힐 뻔했던 정 감독은 2003년 부산 국제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영화계로 돌아왔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정 감독은 “몇 년간을 영화, 드라마와 담을 쌓고 살았는데 국내외의 영화제와 회고전, 후배들의 간곡한 진언 등에 힘입어 자존감을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보냈던 정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세계 영화사에 남을 걸작으로 꼽은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2005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분에 올리는 것을 기점으로 영화인으로의 인생 2막을 열고 있다.
<이태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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