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소극장. 따닥따닥 붙어있는 좌석은 50-60개 남짓. 긴 나무 상자 위에 빨간 방석들이 줄지어 놓여있는 관객석 중간쯤에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곧 암전이 되고, 핀조명 하나가 켜지며, 청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연극배우가 나와 인사를 하고 조근조근 대사를 친다.
하얀 셔츠에 까만 뿔테안경을 끼고 나온 배우는 내가 15년 전쯤 대학교 강당에서 한창 연극 연습을 하던 시절, 함께 배우를 했던 대학 선배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 대기업에 입사해서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고 10여년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살았다.
물론 그는 배우라는 직업 말고도 생활을 위해 다양한 일을 했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 없었던 10여 년 사이에 그는 영화와 드라마에도 출연해왔고, 대학로에서는 꽤 알려진 원로 배우가 되었다. 그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다.
공연이 끝난 후, 호프집에 들러 오랜만에 선배와 마주 앉았다. 두세편의 연극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다는 그에게 물었다.
“어때? 연극하면서 지내는 거?”“하루 종일 연습하고, 공연하고 그러지.”“하고 싶은 거 하니까 좋겠다.”“뭐 그렇기도 하지만, 연극하면서, 배우 하면서 사는 거 쉬운 일은 아니야.”“학교에서 연극하던 후배들이 배우 한다고 찾아오고 그러지 않아?”“한둘 있지만 내가 말리지. 하하!”
대학 3학년 내가 연극을 연출할 때, 배우를 했던 친구는 지금 대기업 10년차 과장이다. 그는 며칠 전 방에 책상을 하나 들여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퇴근 후 두시간씩 공부를 한다. 유학을 가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겠다는 친구는 내게 물었다.
“유학 가서 공부하면 좋겠지? 인생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너는 해봤으니까 알잖아.”“글쎄, 공부를 더 한다고, 학위를 하나 더 받는다고 인생이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닌 거 같아.”
“그렇다고 이대로 정체된 채로 살고 싶지는 않아.”“그렇지, 그러니 진짜 하고 싶은 공부를 해.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걸 한다고 더 나은 인생을 사는 건 아니더라도, 네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그 친구가 공부하는 것에 지지를 보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공부, 아니면 또 다른 무엇. 누구에게나 그런 것들이 가슴에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을 행하며 사는 사람도 있고, 그저 꿈으로만 가슴에 남겨둔 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을 이루고, 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생이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각자의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사실 - 그 선배의 연극 무대를 보며, 10여년 전 봤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떠올랐다.
그들이 기다리던 ‘고도’,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을 매일매일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들. 그 ‘고도’가 배우가 되는 일이거나, 학위를 따는 일이거나, 더 나은 직장을 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 곁에 머물지도 잡히지도 않는 무엇이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고도’가 무엇이라도 괜찮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며, 또는 그 고도를 항해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천형을 지고 태어난 운명이니. 그저 묵묵히 그 길을 바라보고, 기다리며, 나아가는 수밖에. 그 길밖엔 없다.
<김진아 광고전략가 쿠알라룸푸르 Young & Rubic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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