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와 미술관에 다녀왔다. 대수로울 것 없는 이 날의 일이 특별한 사건으로 기억될 만큼, 우리는 오래 이 일을 계획하고 소망하고 기다렸다.
도심 한가운데 있는 이 미술관은 우리가 고되고 급박한 세상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우아하고 근사한 방어벽을 마련해주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잠시 동안 달콤한 해방감을 맛볼 수 있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인간이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할 때마다 생에 대한 욕망이 더해진다고 말했다. 길지 않은 탐미 활동에 쉬이 소생되는 여유를 겪고 있자니, 그의 말대로 인간의 가장 교묘한 적이 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방어벽 하나 갖추지 못한 우리에게 날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공격들, 그것들로 점철된 실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현실. 그 속에서 지쳐가는 관람객들에게 미술관 속 예인(藝人)들은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살았던 소소하거나 혹은 커다란 삶의 가치들을 웅변하는 듯했다.
프루스트는 감상자와 일치된 예술작품의 효용에 대해 이야기했다. 즉, 미술관에 걸려있는 수많은 작품들은 사람들에 의해 관람되고 이해되며 받아들여진 후, 그들의 기억에 안착되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예술품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은 우리를 관찰자로 만들기 일쑤다. 무언가를 깊이 경험하고 알아 갈만한 여유를 허용치 않으며, 그 안에서 수박 겉핥기식의 태도를 가져야만 우리는 실로 압도적인 정보의 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지적대로, 인간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전해 듣는 누군가의 지혜가 곧바로 자신의 일상에 적용되는 예는 애석하게도 그리 흔치 않다.
이번 미술관 방문에서 유독 인상 깊었던 것은 대지 예술(Land Art) 전시였다. 그간 쉽게 미술관에서 만날 수 없던 전시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지 예술이란 예술의 반(反) 물질주의를 주장하며, 자연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 인식을 위한 자연의 창조적 응용을 강조했던 사조이다. 60년대 후반 미술관의 물질주의를 비판하며 사막이나 산악 등지에 직접 작품을 완성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작품이 사진이나 영상물로 남아있어, 그동안 일반인들의 작품 관람이 쉽지 않았다.
미술관을 박차고 나갔던 이들 작품은 결국 뒤늦은 소통을 꿈꾸며 다시 미술관의 품에 안겼다.
비단 예술작품뿐일까. 우리의 체험과 감상을 기다리는 사람과 사물, 사건들은 도처에 넘쳐난다. 바쁜 일상을 핑계 삼아 이들을 외면하는 사이, 되레 자신이 지루하고 외로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프루스트의 정의가 맞는다면, 이로써 우리는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이 예술로 승화될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미술관을 나서면서 친구와 또 다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한 대지 예술가의 작품 속에 있던 사막 속 거석의 실제 모습이 문득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 작품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계획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예상 밖의 무엇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고, 진실한 소통을 거쳐 기대치 않은 삶의 지혜를 얻으며, 두고두고 감상할 자신만의 예술품을 갖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노유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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