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첫 번째 퍼스트 레이디는 물론 조지 워싱턴의 아내 마사 워싱턴이다. 버지니아 제일 갑부의 아내였던 그는 첫 남편이 죽은 후 조지와 결혼해 그를 버지니아 제일의 갑부로 만들어줬다. 당시 대부분 정치인의 아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워싱턴이 재임 중 조용히 내조에만 전념하고 정치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그녀가 한 일 가운데 역사가 기억하는 것은 워싱턴의 유언에 따라 남편이 죽은 후 노예들을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준 것이다. 원래 워싱턴은 마사가 죽은 후 해방시키도록 했으나 시간을 끌 경우 노예들이 마사의 죽음을 ‘인위적으로’ 앞당길 우려가 있어 일찍 풀어줬다는 설이 있다.
마사와는 달리 두 번째 퍼스트 레이디가 된 존 애덤스의 아내 애비게일은 정치 사회적 이슈에 적극 개입했다. 당시 보통 여성들과는 달리 정치, 철학, 문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존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와 편지로 다방면에 걸쳐 자기 의견을 피력했으며 존도 그녀의 생각을 존중했다. 그녀는 특히 여성들의 권익을 존중해줄 것을 촉구, ‘미국 최초의 페미니스트’로도 불린다.
역대 퍼스트 레이디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역사에 흔적을 남긴 인물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아내 일리노어일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프랭클린이 소아마비로 반신불수가 되자 그를 대신해 각종 정치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아동 노동 금지, 최저 임금 보장 등을 기치로 내건 여성 노조를 적극 지지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어서는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서 흑인 가수 마리앤 앤더슨의 링컨 기념관 공연과 흑인 교육가 메리 베툰의 흑인 문제 책임자 임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프랭클린 사망 후 백악관을 나와서도 인권 감시 기구인 ‘프리덤 하우스’를 공동 창립하고 유엔 세계 인권 선언을 작성한 위원회 의장직을 맡았다.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세계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불린 것도 이 때다. 케네디 행정부 때는 ‘여성 지위에 관한 대통령 위원회’ 의장을 지냈으며 1999년 갤럽 조사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20세기인’ 10위 안에 랭크됐다.
잘 하면 퍼스트 레이디가 될 수도 있는 미트 롬니의 아내 앤이 28일 플로리다 탬파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남편을 옹호하는 연설을 해 주목을 받고 있다. 63세의 할머니라고는 믿기 어려운 화려한 용모에 힘이 있으면서 차분한 연설은 남편보다 오히려 낫다는 평까지 들었다. 그녀는 성실한 가장이면서 훌륭한 남편인 롬니를 강조했는데 이는 여성 유권자들 사이 오바마에 훨씬 뒤지고 있는 롬니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저런 말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혼이 난무하고 아이 낳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가 만연돼 있는 요즘 40여년간 남편을 내조하며 다섯 아들을 훌륭히 키워냈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삶 자체가 미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롤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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