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그 고생길이 내 자식이 가야할 길이라면, 기쁘게 고생을 즐기라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교사의 입장에 있다 보니 크고 작은 시련을 겪는 아이들을 지켜보곤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걱정하는 학부모들과 상담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인내하며 기다리세요”라는 교과서적인 말 혹은 “좌절이 클수록 공부가 클 것입니다”라는 위로의 말을 한다.
하지만 정작 시련을 맞는 아이가 내 아이라면, 부모로서 인내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 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아빠의 마음인가 보다.
지난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마스터 클래스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마스터 클래스는 학생들이 관중과 선생님들 앞에서 연주를 한 후 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레슨을 받는 형식이다. 그 날 한 중학생이 대학생도 치기 힘든 어려운 곡을 가지고 나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연주했다. 관중들의 반응도 꽤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강사는 무대 위로 올라가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어려운 곡을 왜 너의 선생님이 너한테 주셨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구나. 너는 이 곡을 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작곡가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정확한 지적이긴 하지만 너무 직설적이었다. 비디오 촬영을 하던 그 학생의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 일은 교육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교육은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주하던 아이가 내 아이라면,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당황스러운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 강사가 못내 야속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성장을 바라는 부모라면 거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교육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시련을 아이가 잘 견뎌내고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의 곁에서 도와야 한다.
인생이라는 길 위엔 수많은 돌부리들이 있다. 인생의 시련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그래서 우리는 수없이 넘어진다. 그때마다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먼 길을 갈 수 있다.
필자가 지휘자로 있는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목회서신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고통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찾아 온 스승입니다. 고통이 아니면 결코 변화를 시도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스승이 찾아와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직면해야하는 고통이라면 용기 있게 받아들이고 나를 성장 시킬 수 있는 에너지로 삼아야 할 것이다.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의 일생도 역경의 연속이었다. 열세 살에 부친이 독살 당하는 등 숱한 역경을 만났으며, 전쟁에서 잇따라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그는 역경이 올 때마다 “역경아, 이번엔 어떤 선물을 주려고 왔느냐?”며 역경을 직면했다고 한다.
인생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포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이 말을 해주자. “역경아, 이번엔 어떤 선물을 주려고 왔느냐?”
<앤드류 박/’박트리오’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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