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큰 바위 얼굴’이라고 부르는 사우스다코타의 러시모어 국립사적지를 오래 전에 가족과 함께 찾아갔었다. 운전하던 아들이 지루했던지 퀴즈를 냈다. “객지에서 돈이 떨어져 며칠 굶은 여행자를 한 주민이 자기 집으로 데려가 푸짐하게 먹여주고 따뜻한 방에서 자도록 해줬다. 기분 좋아진 여행자가 자기 전에 옷을 걸어두려고 벽장문을 열었다가 소스라치며 ‘나는 죽었다!’라고 탄식했다. 무슨 영문인가?”라는 내용이다.
아들이 퀴즈를 냈을 때 자동차는 아이다호 북부 지역을 달리고 있었다. 감자가 많이 생산돼 ‘미국의 강원도’로 불리는 아이다호에는 맛 좋은 감자와 달리 고약한 상징물이 있었다. 백인 우월주의자 단체인 ‘아리안 민족’이었다. 공포의 ‘KKK’(쿠 클럭스 클랜)처럼 신나치주의를 표방한 이 인종혐오 단체의 악명은 한 때 전국적으로 KKK를 압도했었다.
아리안 민족은 어엿한 기독교 단체이다. 하지만 교리가 엉뚱하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직접 창조한 인간인 아담은 백인들만의 조상이며, 가나안땅의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인종은 이브가 사탄의 꾐에 빠져 원죄를 짓고 출산한 가인의 후예라는 것이다. 따라서 백인들은 다른 인종들을 멸절시켜 백인 세상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1970년대 아이다호주 헤이든 호수 주변에 ‘예수 그리스도-크리스천 교회’를 창설한 교주 리처드 버틀러는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를 공개적으로 찬양했다. 그는 교회 주위 20 에이커에 아리안 민족 영지를 구축하고 매년 전국 지부와 전 세계의 유사 인종혐오단체들을 초청해 ‘아리안 민족 세계총회’를 개최하면서 총격술 등 테러를 훈련시켰다.
연방수사국(FBI)이 ‘테러위협 단체’로 꼽을 만큼 기세등등했던 아리안 민족은 1998년 쇠락의 늪에 빠졌다. 교회 경비원들이 영지 도로를 지나던 자동차를 도랑에 처박고 차 안의 여성과 아들을 끌어내 폭행했다. 한 달 후엔 전직 경비원이 LA 유대인 센터에서 기관총 70여 발을 난사하며 5명에 중상을 입히고 도주하다가 필리핀계 우편배달부를 사살했다.
아리안 민족은 폭행당한 모자가 2000년 제소한 민사소송에서 630만달러 배상판결을 받자 파산선고를 냈고, 영지는 경매에 붙여져 매각됐다. 유명무실해진 아리안 민족은 2004년 플로리다의 세브링으로 본부를 옮겼다. 실세에서 밀려난 버틀러도 건강이 악화돼 그해 86세로 사망했다. 우리 가족이 아이다호를 지난 건 버틀러가 죽은 다음해였다.
한동안 잠잠했던 인종혐오 단체의 망령이 요즘 부활하고 있다. 조지아주 KKK가 지난주 주정부에 ‘하이웨이 입양’을 신청했다가 ‘기대했던 대로’ 거절당했다. ‘하이웨이 입양’은 기업체나 사회단체가 1마일 구간의 간선도로를 책임지고 청소한다는 공개청약이다. 전국의 모든 고속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하이웨이 입양 사인판에는 청약단체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지아 주정부는 하이웨이 입양 사인판에 ‘KKK’ 글자가 들어 있는 건 사회정서상 바람직하지 않다며 퇴짜를 놨고, KKK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정헌법상의 언론자유를 들어 제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KKK는 이 케이스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가는 동안 KKK가 인종혐오 단체 아닌 시민정신을 구현하는 ‘착한 단체’라는 이미지를 한껏 선전할 속셈이다.
인종혐오는 미국인(백인)들의 가장 큰 치부이다. 서부개척 때 인디언 도륙, 중국인 귀화를 금지한 ‘황화’, 2차대전 중 일본인 집단수용이 그랬다. FBI는 2010년 한해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6,624건의 혐오범죄 중 거의 절반인 47.3%가 인종혐오 케이스였다고 밝혔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대상은 ‘니거’(검둥이)이다. 그들의 조상인 흑인노예를 해방시킨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조각초상도 포함된 ‘큰 바위 얼굴’을 구경하고 귀가 길에 다시 아이다호를 지날 때 아들이 가는 길에 냈던 퀴즈의 정답을 가르쳐줬다. 여행자는 흑인이었고 그가 벽장문을 열었을 때 안에 걸려 있던 두건 달린 KKK 단원복을 봤다는 것이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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