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을 넘어 ‘힐링’ 마케팅이 대세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몸에 좋은 것을 알리는 ‘웰빙’이라는 광고문구보다 ‘회복’ ‘치유’ ‘재충전’ 같은 단어들이 근래 유독 눈에 띄는 듯하다. 최근 한국 보건복지부가 경증 우울증을 정신질환 범주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가벼운 정신질환은 크게 대수로울 것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추세가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치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종로 등 서울도심에는 심리치료 전문가들이 인도하는 힐링 투어까지 생겼다는데, 꽤나 인기가 있는 모양이다. 치유가 필요한 현대인. 이들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독일 최고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극찬했다는 한병철 교수(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학)의 책 <피로사회>가 얼마 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됐다.
한 교수는 이 책에서 “과거 사회가 금지(해서는 안 된다)에 의해 이뤄진 부정의 사회였다면, 오늘날의 성과사회는 긍정(할 수 있다)의 사회”라고 설명한다. 문제는 무조건적인 성공을 위해 제거된 ‘부정성’으로 말미암아 과잉된 ‘긍정’의 구름이 현대인들을 무섭게 짓누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뭐든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회에서의 실패는 곧 자아의 무능력을 의미한다. 때문에 자신이 인생의 주체라는 존재감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과도한 목표와 요구를 설정하고, 그에 부응하기 위한 몸부림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곧 치유를 갈망하는 세대를 낳은 ‘피로’의 생성과정이다.
그는 “과거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지만, 오늘날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고 진단한다. 듣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얘기다. 하지만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로, 현대인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저자의 이어지는 지적은 흘려듣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은 몇 해 전 독일에서 출간되자마자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깊이 있고 날카롭게 다뤘다며 평단과 학계, 그리고 대중의 뜨거운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날마다 느끼는 극한의 피로의 원인, 그에 대한 해결책에 목말라있다는 방증이다.
‘탈진증후군(Burnout Syndrome)’
이라는 전문용어를 찾지 않아도, 우리 세대의 주요 병인이 강박적인 성과주의에 의한 ‘피로’라는 진단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아쉬운 건 바로 치료책이다.
인간의 부자유함은 지적하지만, 이들을 진정으로 자유하게 할 방법은 모르는 많은 현대 지식인들처럼, 이 책은 우리가 날마다 병적으로 집착하는 강박적 멀티태스킹을 멈추고, 창조적 인간을 양산하는 ‘깊은 심심함’을 회복하자는 다소 진부한 결론에 도달한다. 더불어 페터 한트케의 말을 인용해, 자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개방해 세계를 받아들이고 흡수할 수 있는 발전적 의미로써의 피로를 지향하자고도 한다.
처음 ‘깊은 심심함’을 주장한 발터 베냐민은 생존과 성공에의 과도한 집착에 따른 과잉주의에서 벗어나, 심심함을 느끼는 것에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조언한다. 잡은 먹이를 먹는 동안에도 불안하게 주위를 살피는 야생 동물적 행태를 멈추고, ‘심심함’을 누려 인간 본연의 창조성을 회복하자는 접근이다.
용기 있는 후퇴나 중단에 대해 말하기에는, 현대인의 정체성 명제 ‘나는 할 수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개인과 사회저변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있다. 또한 긍정적 피로를 이야기하기에 우리는 이미 지나치게 많은 것에 에너지를 빼앗기고 있다.
절대로 사회의 이상적 목표가 될 수 없는 성과사회 패러다임의 실패를 인정하고 이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피로사회를 치유하는 참된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무거운 담론이 끊이지 않는 작금의 세대가 안쓰럽다.
노유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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