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따스한 주말 오전. 오랜만에 산타모니카 피어에 갔다. 피어 입구에 들어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걸어가자니, 멀지 않은 곳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온다.
산타모니카에 즐비한 전문 거리악사 답지 않은 어설픔이 느껴지지만, 멜로디에 무언지 모를 유쾌함이 실려 있다.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얼마가지 않아 푸르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알록달록 예쁘게 칠해진 피아노와 그 앞 좁은 의자 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어린 남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의 짧은 연주가 끝나자, 한 할아버지가 조용히 피아노로 다가가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는 이내 귀에 익은 옛 멜로디를 한음한음 차분히 연주한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할아버지의 연주를 들으며 피아노를 살펴보니 “Play Me, I’m Yours”라는 사랑스런 글귀가 눈에 띈다. 원하는 누구나 연주할 수 있도록 놓여진, 그런 피아노였다.
후에 알아보니 이 ‘거리의 피아노’는 영국의 설치미술가 루크 제라의 작품으로, 지난 2008년부터 세계 유명도시, 유독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종종 소개되어 왔다고 한다.
이날 산타모니카에서 만난 피아노는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인 제프리 카헤인이 15년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있어준 데 대해 LA 챔버오케스트라가 마련한 감사 이벤트의 일환으로 작가의 도움을 받아 LA에 설치한 30대의 피아노 중 하나였다.
도시를 마치 3차원의 캔버스로 만들어 행인들의 마음까지 곱게 채색하고 있던 거리의 피아노. 어느 곡 하나 전문연주자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작은 음 하나 흘려듣게 되진 않았다.
연주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낯선 청중들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사람들은 줄을 서가며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도 순서에 연연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연주를 경청했고, 아는 곡이 연주되면 아이처럼 기뻐하며 흥얼댔다.
이전에 만난 적 없는, 대부분 이후에도 볼일 없을 사람들. 각양각색의 선곡과 즉흥 연주가 꼭 스스로 나누는 자신들의 짧은 삶의 이야기 같아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문득 우리의 심장 박동이 걸음의 속도와 친숙하다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바로 어느 중년 여성의 조용한 연주를 끝으로 자리를 뜨는 내 걸음이 유독 느리고 여유로워진 순간이었다.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일행과 한동안 거리의 피아노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이후 전화기 속 온라인 메신저에 올린 사진에 담긴 당시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는 많은 지인들과 잊고 있던 안부를 주고받기도 했다.
풍성한 대화의 창을 열어준 그 예술가가 고마웠다. 사소한 새로움에도 금세 유쾌해질 수밖에 없는 일상의 지루함이 폭로되는 듯해 못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좋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더불어 당시 함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만이 기억할 ‘공감’이라는 따뜻함에도 기뻤다. 한시적으로 주어진 무대에서 배우와 관객의 구별 없이 만들어낸 그날의 드라마는 ‘나’ 중심의 삶의 공간을 ‘우리’로 확장해도 되겠다는 작은 희망을 갖게 했다.
누군가가 좋아하는 음악에 내 감정이 움직이고, 내 얼굴의 미소가 또다시 누군가의 얼굴로 번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게다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때때로 복잡하게 느껴지던 인간관계의 풍경이 한결 단순해지는 기분이었다.
파도와 피아노와 너와 나. 이렇게 기대치 않은 조합이 이뤄낸 온기어린 앙상블이었다.
노유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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