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보다는 다큐멘터리에 열광하는 지인들이 주위에 많다. 사회인으로서의 년차가 늘어감에 따라 정도는 더욱 확고해지는데, 그들은 대개 문학의 무효용성을 함께 역설하곤 한다. 이해한다.
교과서에까지 실린 시인 박목월의 국민적 애송시 <나그네>에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시구가 등장한다. 식민지 말 공출로 술 만들 쌀은커녕 먹을 쌀 구경조차 어려웠던 당시 상황을 떠올려본다면, 시인의 한가로운 저녁노을 타령에 대한 비난은 십분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문학의 효용이 시대성에만 있는 건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작가의 자아도취적 만족이나 현실도피 역시 답이라고 할 순 없다.
게다가 예술성이 짙은 숲을 지닌 ‘문학 산’을 넘는 데에는 고도의 이해력과 집중력이라는 단단한 무장이 필요하다. 이처럼 문학은 여러 이유로 거칠고 바쁜 세상의 조류에 초연한 척하고자 하는 한량들의 도피처라 오해받을 만한 소지를 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가 세차게 오던 지난 주말. 우연히 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무엇을 하고 있었냐는 내 질문에 그는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는 근래 좀처럼 듣기 힘든 답변을 했다. 설마 하는 반가움에 어떤 소설이냐고 물으니, 그는 선뜻 내가 좋아하는 한 고전작품의 이름을 댔다.
평소 문학보다는 자기개발서 등 실용문을 즐기던 친구. 그에게 왜 소설을, 게다가 고전소설을 읽고 있는지를 물으니, 이런 책에는 삶의 문제에 대한 재빠른 대답보다는 좋은 질문이 있다는 꽤나 깊은 대답까지 한다.
우리는 대답이 난무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어떤 문제를 내놔도, 그것의 원인을 분석하는 각종 분야의 해답들이 순식간에 쏟아진다. 누구하나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없다. 특히 온라인 세상에는 마치 장난 같이 보이는 가벼운 질문에도 진지한 답을 아끼지 않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살고 있다.
깊은 사고를 방해한다는 것이 현대인의 이러한 ‘신속한 단정과 해결’의 가장 큰 맹점이다. 좀처럼 깊이 고민할, 스스로의 답을 찾을 시간을 갖기 힘든 사회가 되어간다는 의미다.
과연 모든 문제에 그처럼 순번을 매겨가며 댈 수 있는 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또한 그 문제는 진정 고민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인터넷을 하루만 멀리해도, 따라잡아야할 정보들이 산적된다. 그 모든 것을 진정 따라잡아야 하는지, 기어코 따라잡아 획득한 지식이 과연 삶의 지혜로 변환될 수 있을지 고민해볼 일이다.
고전문학 읽기. 시작은 지루할 수 있다. 동영상처럼 빠르게 뒤로 돌려 결론부터 보거나,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 쉽게 골라 읽기 힘들다. 재빠른 전개와 결론이 없어 답답함을 느끼거나 시대적 배경이 너무 달라 상상 작업이 번거롭게만 느껴지고, 생각보다 빠르게 넘겨지지 않는 책장이, 결론보다는 과정 묘사에 충실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유일하게 시와 소설 두 분야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신비평 이론가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라는 글에서 “소설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누군가 명확히 정리해놓은 지식을 자신의 답 삼아 이야기하며 살 때가 많다. 공개된 것을 검증된 것인 냥 믿고 기댈수록, 깊은 성찰도 풍성한 대화도 힘들어진다.
시간을 내어 서가에 꽂아두었던 책을 꺼내보는 건 어떨까. 여운을 위한 충분한 시간까지 마련했다면 소설 속 어리둥절한 인생사에 동조해보며, 이내 좋은 인생의 질문으로 인도해줄 문인들의 가이드를 받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노유미 /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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