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들이 가물가물 해지고 있다.
작년, 한국에서 안식년을 맞으신 아버지는 공동 연구를 할 수 있는 다른 기회를 포기하시고 엄마와 함께 이곳에 오셔서 우리 가족과 일년을 보내셨다. 유학을 이유로 일찌감치 미국에 와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해, 끝내 이 나라에 정착을 해버린 나에게 작년은 대단히 큰 선물이었다.
처음 우려와는 달리 장인 장모님과 한 집 생활을 즐기던 남편이나, 매일 할아버지 지도하에 한글 공부하던 큰 애,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작년 초에 태어난 둘째까지, 그 때까지만 해도 두 분 부모님이 우리 가족에게 해주신 것들, 남기고 가신 자취들은 너무나 선명하고 뚜fut했다.
아버지와 남편은 둘 다 공학을 전공했다. 저녁 식사 때면 반주를 함께하며 한국과 미국의 정치나 경제, 과학 등의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비슷했다. 먼저 나서지 않는 성격과 사물을 보는 시각, 술을 즐기는 습관까지… 나는 오랜만에 가까이에서 보는 아빠의 모습에서 남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큰 애는 외할아버지가 한글을 가르쳐 주신 덕분에 한글학교에서 우등상을 타 왔다. 수상 소감 시간이 있었다면 “이 영광을 외할아버지께…”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외할아버지가 그러셨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한번은 아이가 지각들이 서로 부딪혀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라고 했다. 어디서 들었냐니까,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며 “진짜야…”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마는 산후 조리를 시작으로 일년간 둘째를 봐주시면서 우유 타는 것부터, 아이 씻기는 것, 이유식 만드는 것까지 내가 해야하는 일들의 대부분을 해주셨다. 내가 출산 후 힘든 시간에 남편과 둘 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두 아이를 봐주신 엄마 덕분이었다.
하지만 작년 말, 외할머니의 병세 악화로 부모님이 급하게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가신 후 우리는 빨리 일상으로 복귀를 했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을 돌보랴, 힘에 부친 집안 일하랴, 강의 준비하랴,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내 생활이니 하루 빨리 안정을 찾는게 중요했지만 어쨌거나 부모님의 추억은 급속도로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고, 가끔은 언제 오셨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며칠 전, 부모님이 쓰시던 방을 끝내 정리하고 말았다. 두 분이 쓰시던 침대를 아이 방으로 옮기고, 옷장 서랍들을 깨끗이 비우고, 책상에 있던 필기도구들을 조그만 상자 안에 넣고 있는데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엄마가 영어 공부하신다고 매일 사용하시던 공책과 아버지가 손자를 가르치신다고 사신 과학 백과사전 위로 두 분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두 분의 흔적은 식탁에도 있었다. 채식을 좋아하셔서 이틀에 한번은 밥상에 올라오던 상추, 배추, 깻잎, 그리고 풋고추에 곁들인 파절이가 가득하던 식사 시간이 기억났다. 가지치기는 꽃과 나뭇잎이 다 져버린 겨울에 해야 마음이 안 아프다고 하시던 부모님은 뒷마당에도 계셨고,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주시던 거실과 욕실에도 계셨다.
바쁘게 쉬지 않고 돌아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제의 기억과 추억을 모두 되새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 힘든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일일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이 순간에도 부모님은 자식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속에서 오늘을 보내고 계실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모든 걸 소진하고도 그걸 기쁘게 여기는 부모님의 사랑이, 사랑의 최고의 본질을 몸소 보여주신 부모님이… 몹시 그리워 두 분 생각이 아련한 밤이다.
지니 조/ 마케팅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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