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선 씨. 이젠 일흔 하나의 ‘젊은 할머니’가 됐지만 장년세대 이상에는 ‘이 시스터즈’란 불멸의 이름으로 각인된, 60년대를 격동시킨 대스타다.
김명자란 이름으로 언니 김천자씨 등과 결성, 64년 데뷔한 이 시스터즈는 ‘울릉도 트위스트’ ‘남성금지구역’ ‘서울의 아가씨’ ‘목석같은 사내’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별들에게 물어봐’ 등 별빛 같은 히트곡을 남겼다. 골목 안 개구쟁이들도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호박엿’을 합창했을 정도였다. 군인들의 애창곡인 ‘여군 미스 리’와 70년대 초반 새마을 운동 노래처럼 불린 ‘좋아졌네’도 그들의 빛나는 작품이었다.
발랄한 트위스트로 낡은 시대의 무딘 감성을 자극하고, 관능의 코드로 전후(戰後)의 칙칙함을 몰아내던 3인조 이 시스터즈는 60년대의 보사노바였다. 생동감 넘치고 고음이 매력적인 그들의 하모니는 절정을 구가했다.
전성기이던 66년 결혼도 했다. 순탄하기만 하던 젊은 날. 하지만 73년의 그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세 살 난 딸 유선이가 뇌성마비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가수 활동을 중단하고 아이의 치료를 위해 재활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취학연령이 되자 엄마는 딸을 일반 초등학교에 보냈다. 고등학교까지 정상적인 아이들 속에서 키웠다. 딸을 데리고 외출도 서슴지 않고 했다.
“딸을 장애자의 삶속에 가두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의 시선이 싫었지만 나부터 움츠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습니다. 장애를 숨기고 바깥에 내보내지 않고 집에만 두기보다 떳떳하게 데리고 다녔어요. 딸이 말도 어눌하고, 비실거리고 잘 걷지 못하고 넘어져도. 그래서 일반학교에 보낸 거구요.”
사회적 편견은 장애자에게 바늘과 실처럼 늘 따라다녔다. 중학교 때 딸의 방을 청소하던 엄마는 우연히 일기장을 보게 된다. “부모님은 왜 나를 태어나게 했을까.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게 너무 싫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딸에게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북받치는 슬픔에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딸이 좌절하지 않게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부모의 역할은 장애 자녀에게 계속 용기와 격려를 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눈에 거슬리는 게 있어도 잘한다, 잘한다 하며 자신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해요. 항상 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심지 굳은 딸도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주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구경’을 해도, 동네 아이들이 놀려도 집에 와서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운동회 때는 선생님이 “너는 안 뛰어도 된다.”고 해도 비틀거리며 젖 먹던 힘을 다해 끝까지 뛰었다. 공부도 밤샘을 하며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한 성적을 냈다.
“늘 딸에게 말했어요. 공부를 잘 하면 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못할 거다. 유선이가 다행히 성격이 밝고 도전정신이 강해 그 힘든 시기를 스스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공부가 전부이던 학창시절, 원하던 대학 입시에서 실패한 건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상심에 빠진 딸에게 부모님은 유학을 권했다. 마침 이 시스터즈에서 함께 활동한 언니 김천숙씨가 버지니아로 교육이민을 와 있던 터였다. 딸은 선뜻 응했다. 89년이었다.
낯선 땅에서 ESL 코스로 힘들게 영어를 익히며 딸은 아무리 노력해도 진전이 없자 아예 입을 닫아버리기도 했다. 김희선 씨는 한국의 남편과 버지니아의 딸 사이를 오가며 뒷바라지했다.
천고만고 끝에 딸은 2004년 조지 메이슨 대학에서 의사소통 보조기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언어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재활공학 분야에서 한국인 최초의 값진 박사학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유학 온 게 주님의 뜻이 아닌가 싶어요. 한국에서라면 딸이 이런 자리에 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행여 다칠까, 상처받진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하던 딸은 당당한 대학교수가 됐다. 정유선 교수(41)는 현재 모교에서 특수교육의 일환인 보조공학을 가르치고 있다. 가정도 꾸렸다. 유학 생활 중 만난 장석화 씨와 95년 결혼식을 올렸다. “평생 결혼도 못하고 살 줄 알았어요. 한 가정의 아내로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줄 알았어요. 근데 아들, 딸 놓고 잘 살고 잘 키워요. 너무 대견하지요.”
딸을 뒷바라지하며 어머니 김씨의 삶도 덩달아 바뀌었다. 유명 가수에서 동화 구연가가 된 것이다. “아이가 재활원이나 학교에서 집에 오면 밖에 나가 놀지도 못하니 제가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었어요. 마주 앉아 의성어를 섞어가며 자연스럽게 동화를 읽어주다 보니 어느새 제가 동화구연가가 된 것 있죠?”
76년 색동회 주최 전국어머니동화구연대회에 입상했다. 이듬해에는 동화구연회 창립도 했다. 현재 색동회 이사로 있는 김씨는 고아원과 소아병동, 장애기관을 찾아 동화를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오는 18일(일) 오후 4시에는 메릴랜드에서 강연도 한다. 한미장애인협회에서 딸을 키운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응한 것이다.
“특별한 건 없어요. 무엇보다 가족의 사랑이 중요하고, 끊임없이 용기를 주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저는 아쉽게 무대를 떠났지만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지금 무한 행복합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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