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기다리던 발표가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끝내고 집으로 가 결과를 확인하리라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만약 그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컴퓨터 전원을 켜고 기다리는 찰나에도 기다림이 주는 묘한 설렘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구는 발표시간이 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결과를 찾아 알려주었다. 괜찮다는 내 대답을 의례적인 사양이라고 생각했을까? 순간 허탈함을 느꼈다.
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지금 네가 몇 세기에 사는 줄 아느냐?”며, 문명의 이기를 이용할 줄 모르는 나를 답답해하지만, 난 손에서 쉽게 놓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갖게 된다는 게 그리 달갑지 않다.
주위 많은 친구들은 스마트폰이 현대인의 인간관계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에 대해 역설하곤 한다. 지금 당장 눈앞에 없는 친구들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주말은 어땠는지, 최근에는 누구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등등. 이 모든 정보들을 접할 길 없는 나는 당연히 그 무리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다. 나는 보통 무리에서 가장 늦게 친구들의 뉴스를 접하는 사람 중 하나니까.
하지만 이렇게 편리하다는 스마트폰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실제 오프라인 상에서 서로에게 집중하는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듯하다. 여러 명의 일행이 한 테이블에 앉아있어도 진지하게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전화기만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은 마치 매우 가까운듯하지만 서로에게 붙어있지는 않은 작은 조각 섬들을 연상시킨다.
친구들은 “지금 누가 어디에 있어” “누가 누구를 만났네” 라며, 손닿을 곳에 있는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보다는 전화기 안에 있는 누군가의 행적을 끊임없이 훑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다.
핸드폰 보급이 가속화되기 시작했을 때, 삐삐시대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숫자를 서로만의 은밀한 암호로 사용하고, 혹시 그 사람의 메시지일지 모른다며 잰 걸음으로 가까운 공중전화를 찾던 그런 향수 말이다. 전화기 발신 표시 서비스가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의외의 전화를 받고 설레던 경험을 그리워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걸 ‘낭만’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낭만은 기다림과 참 가까운 단어이다. 기다림은 꿈을 꾸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온라인 기기에 의존할 수 없었던 당시의 우리들은 잠시 스치는 만남에 조금 더 충실할 수 있었고,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을 인내하며 기다림을 배울 수 있었다.
세상은, 특히 기술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보한다. 이런 속도라면 삐삐를 그리워하듯 머지않은 미래에 지금의 스마트폰을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시대 흐름에 역행해 과도한 감상주의에 빠지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과거 ‘낭만’이 지금처럼 정형화된 매뉴얼 안에서의 관계가 아닌, 조금 더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인간관계를 의미했다면, 이젠 그 기억을 되살려 더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주어진 지척의 관계에도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이다.
가끔은 손바닥만 한 기계 안 일괄적이고 정연한 틀로 짜인 세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보자. 바로 우리 앞에 그에는 비견할 수도 없는 깊이와 넓이를 가진 인간이라는 우주가 펼쳐져 있지 않은가.
노유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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