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는 퇴임 전과 퇴임 후 평가가 매우 엇갈리는 인물이다. 워터게이트로 얼룩진 워싱턴의 부패를 일신하고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는 그의 공약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의 참신함이 무명 정치인이던 그를 일약 미국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앉혔다.
그러나 취임 직후부터 그는 의회와 마찰을 빚기 시작했고 동생 빌리의 정치 자금 스캔들에다 국무장관이던 밴스와 안보 담당 보좌관인 브레진스키와의 갈등 등이 겹쳐 혼선을 빚었다. 임기 중반 내각을 대폭 갈고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는 대국민 연설을 하며 지도력을 발휘해 보려 애썼지만 모두 무위에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기름 값이 치솟으며 미국인들은 주유소 앞에 줄을 서야 했고 소련과의 데탕트를 추구했던 카터에게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 침공이라는 뒤통수 치기로 응답했다. 1980년 선거에서 레이건에게 선거인단 수에 있어 489대 49라는 역사상 드문 표차로 참패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퇴임 후에는 ‘인류를 위한 삶터’(Habitat for Humanity) 등 저 소득자를 위한 주택 건설 사업에 발 벗고 나서 직접 망치를 들고 집을 짓는가 하면 분쟁 지역이라면 어디나 뛰어가 중재자 역할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와 함께 ‘가장 훌륭한 전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까지 됐다.
그러나 퇴임 전이나 후나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 그와 만난 독재자는 머지않아 죽는다는 소위 ‘카터 효과’다. 1977년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만난 이란의 팔레비는 1979년 회교 혁명으로 쫓겨난 후 이 나라 저 나라 병상을 전전하다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1979년 6월 한국을 방문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만난 후 인권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그의 독재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그 후 몇 달도 되지 않아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1994년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지며 한반도가 전쟁 일보 전까지 가자 그는 다시 6월 김일성을 만나 제네바 협상을 추진하지만 김일성은 역시 불과 한 달 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카터는 작년에도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곰즈를 데리러 평양에 갔지만 김정일은 만나지 못했다. 공교롭게 그 때 김정일은 중국 순방 중이라 만나지 못했는데 그게 우연의 일치인지 고의적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카터 전 대통령이 26일 세 번째로 북한을 방문했다.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측의 김정일이 이번에는 카터를 만나줄 것으로 예상됐지만 27일 현재 만났다는 소식은 없다. 혹시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김정일이 ‘카터 효과’에 대해 전해 듣고 고의적으로 면담을 기피한 것은 아닐까. ‘인권의 사도’를 자처하며 북한 인권에 대해서 침묵하는 카터가 왜 이리 북한을 자주 찾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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