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인이다. 축구의 업사이드 판정은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면서, 월드컵 때만 되면 갑자기 빨간 티셔츠를 모조리 꺼내 입고 태극기를 찾아 아들 손에 쥐어주는 열렬 축구인이 된다. 월드컵을 놓고 고민하는 주변 몇몇 사람들의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는 사이비 붉은 악마이기도 하고, 나름대로 월드컵을 즐기는 몇가지 룰을 정해 놓고 혼자서 신이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평소에는 축구에 관심도 없으면서, 월드컵 기간이 되면 거리로 뛰쳐나가 그 누구보다도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자신이 약간은 부끄럽다는 후배가 있다. 대표 선수들 이름도 모를 정도로 무관심한 자신이 진정한 축구팬이라는 게 부끄럽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2년 한국 축구가 4강의 신화를 이룬 것은 한국 선수들의 실력 뿐 아니라, 거리로 나와 그제야 FIFA가 뭔지를 알게 됐던 많은 사람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비약적 열망을 허락하기에 월드컵이 즐겁다. 나 역시 골키퍼 선수의 이름도 몰랐지만, 한국 골키퍼의 투혼에 고개 숙이고 함성을 보내기에 월드컵을 즐길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북한과 브라질의 경기가 있던 날, 과연 북한을 공식적으로 응원해도 될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글을 페이스북을 통해서 봤다. 천안함 사건이 몰고 온 경색국면에 북한을 대놓고 응원하자니 뒤통수가 따갑다는 말이다.
정통 축구의 진수를 보여주는 영국은 노동 계급의 역사와 함께 하지만, 경기관람에는 노동과 자본의 계급 경계를 허무는 탈정치의 순간을 구현한다. 북한을 응원하건 브라질을 응원하건, 정치가 뒤로 밀리는 한순간이 난 마냥 즐겁다.
한국 축구를 응원하지만 자신이 붉은 악마라 불리는 데에는 좀 어색하다는 동료도 있다. ‘악마’라는 단어와 종교적 신념이 마찰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붉은 악마가 어떻게 시작되었든 붉은 악마는 그 이름의 표기적 의미보다는 표의의 상징성을 충분히 지배적인 위치에 올려놓았다. 붉은 악마의 이름에 ‘악마’의 의미를 굳이 두지 않는 이들에게 이 이름을 거두라고 요구하는 것이 종교적 미덕으로 보이지만은 않는다.
국가나 종교도 한발 물러서야 하는 어떤 열정에 대한 관용이 지배하는 상황이다. 월드컵 기간 동안 나 자신의 종교는 ‘관용 교’라 불릴 것이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 이후 한국의 패인 요인들과 나이지리아전 전략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북한 팀이 부럽고 히딩크가 그립다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들이 시험을 못 치니까 조카가 부럽고, 아들의 예전 담임선생이 그립다고 얘기하는 것과 뭐가 다르랴.
축구는 FIFA 랭킹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절대 믿음의 산물이기도 하다. 현재 뛰고 있는 모든 선수들에 집중하는 무한한 맹신이 부끄럽지 않은 순간을 허락하기에 월드컵은 즐겁다.
스포츠가 애국주의라는 그늘진 이데올로기나 전체주의라는 집단광기의 역사라고 지적하는 세련되어 보이는 지식인도 있다. 여기에 대한 나의 자위는 오히려 간단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월드컵을 피할 수 있는가? 피하는 사람을 비난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듯이, 즐기는 사람들 또한 애국주의와 전체주의 딱지에서 벗어나는 면죄부를 받을 자격이 있다. 둘 다 한국의 월드컵 16강을 한마음으로 기원한다는 사실만을 즐기자. 나는 피 속에 검고 흰 오각형의 혈구들이 얼룩덜룩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의아할 뿐인 한국인이다.
문선영 / 영화마케팅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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