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중간고사가 한창이었다. 정신없이 시험을 끝내고 강의실을 나왔지만 시험 후의 홀가분함은 없었다. 놓쳐버린 보너스점수 때문이었다. 보너스 질문의 내용은 이번에도 역시 교수님의 이름을 적는 것이었다. 시험범위와 무관한 보너스 질문이 있는 시험지에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질문이 바로 교수님 이름 적어내기다.
매 학기 적어도 한번은 마주치는 질문이니까 잦다면 잦은 셈이다. 높은 출제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당장 닥친 시험에 온 마음이 쏠려 재차 확인할 생각조차 못하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매주 만나는 교수님의 이름을 묻는 질문이 고민이 된다는 것이 당당한 일은 아니지만,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이렇게 질문거리가 될 정도로 쉽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꽤 긴 성을 가진 유럽계 교수님인데 정확한 이름을 기억해낼 자신이 없어 적어보다가 결국 지워버리고 말았다.
틀린 이름을 적어내는 실례를 범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 이번에도 그냥 깨끗하게 2점을 포기했던 것이다.
교수님 이름쓰기.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적엔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질문이다. 한국에서라면 틀릴 걱정도 없을 문제일 테고 말이다. 철수나 영희만큼이나 친숙한 이름의 톰과 제인은 생각처럼 흔치 않았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더욱 외울 길 없는 건 성이다. 다양한 문화적 인종적 배경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성들은 발음하기조차 주저될 때가 많다.
이름은 ‘이르다’라는 의미의 옛말인 ‘닐다’에서 유래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일러 그에게 이르는 ‘호명’ 행위는 이처럼 구별의 의미를 갖는다. 시인 김춘수도 그의 시 ‘꽃’을 통해 노래하지 않았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특정한 누군가를 이르는 말. 그래서 일반분류를 위해 한 이름으로 통칭되는 물건의 예와는 다르게 우리 각각의 이름은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가 된다. 동일한 이름의 경우에도 말이다. 많은 관계의 시작이 통성명이라는 이름교환에서 비롯되듯이, 이름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가르는 일차 기준이 될 때가 많다. 이름을 교환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단계만 거쳐도 일단 우리는 상대를 알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깊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적어도 더 깊은 이해의 단계로 가는 작은 문 하나 정도는 통과한 셈이 아닌가.
지나보면 벌써 몇 학기째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은연 중 기대해 왔던 다채로운 캠퍼스 낭만은 없는 것 같다. 문득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 하지 않았던 내 무심함에서 시작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을 부딪쳐나가는 용기 있고 건설적인 적극성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그들과 나의 인종적 또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앞서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인간적인 공통점에 대해 더욱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한국에서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듯 그렇게 강의실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보아야겠다. 내 이름을 알려주고 또 그들의 이름을 물어가다 보면 어느새 이전엔 맡아보지 못한 새로운 향기 가득한 꽃길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노유미 / 칼스테이트 노스리지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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