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로 출장을 갔다. 도착한 다음날 동네 교민들이 모인 점심식사자리에 끼여 처음 보는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모인 분들을 소개하는 데 이분은 모기업 주재원 지점장 부인이시고, 저분은 해외 유수의 모기업 사장 부인 식이어서 당사자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단 한사람뿐이었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남편의 직장과 아이들의 이름으로 규정지어지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어디 하루 이틀 안 얘기인가.
대화는 흘러 흘러 살기 좋은 지역은 어디며, 새로 지은 콘도의 투자가치가 얼마이며, 명품가방은 여기보다 한국이 저렴하다는 등의 얘기들로 이어졌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어느새 우리가 먹은 접시를 치우고 과일과 차를 내오는 가정부, 라티파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라티파는 인도네시아 태생의 상주 가사 도우미. 32세, 기혼이며 남편도 인도네시아 태생으로 말레이시아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고 있지만, 한달에 두번 라티파가 쉬는 날에만 본다. 그것마저도 남편이 일거리가 있으면 못보고 만다.
그녀는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하며 한국음식도 수준급으로 해내고, 3살 박이 사내아이의 가장 좋은 보모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가 한달에 받는 월급은 미화 300달러. 그녀의 신상정보는 일주일간 머물면서 내가 그녀에게 직접 물어본 것도 있고, 지인에게 들은 얘기들도 있다.
라티파는 자신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면 아주 수줍어하며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조근조근 얘기했다. 아주 영리한 눈빛으로.
라티파가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러 나간 사이, 조심스레 부엌 뒤편에 있는 그녀의 방을 살짝 들여다봤다. 몸 하나 뉘일 수 있는 공간. 작은 홑이불 한 채와 앉은뱅이책상 하나. 그 위엔 소박한 머리끈 두어 개와 손바닥만 한 손거울이 전부. 천장에 노끈으로 매여 있는 옷걸이에는 두세벌의 옷이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그래도 그녀는 너무나 해맑다. 해맑을 수 없는 상황에 해맑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불공평한 처지를, 불공평한 체제를 불만 없이 살아내는 것조차 당연시하는 삶. 그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그것을 아는 순간 해맑은 웃음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또한 안다고 현실이 바뀌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영 맘이 석연치가 않다. 내가 인도네시아에 태어났다면 그녀의 자리가 내 자리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 하나 그녀의 잘못도, 노력 부족도, 우매함에서도 기인한 일이 아니란 것을 그녀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사람 좋은 나의 지인에게 넌지시 그녀의 사정을 물어보니 지인도 안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도 60-70년대 그렇게 외국에서 또는 국내에서 일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이 많았다는 것 또한 상기시킨다.
그래…우리도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200-300달러에 그녀들을 집안에 두고 그 노동력을 사는 것은 정당한 것일까.
흔한 말로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불공평한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바람대로 이삼년 후 남편과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예쁜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게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LA로 돌아와서도 그녀의 해맑은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김진아 / 캠벨 이웰드 시장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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