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피아니스트 백건우씨를 가까이에서 보게 된 것은 그가 연주여행을 하기 위해 뉴욕주 버펄로에 오게 되었을 때였다. 가을이 깊어가던 때였는데, 그 당시 뉴욕 주립대 경상계열 메인 캠퍼스인 그 곳에서 새파란 20대 말 애송이 조교수로 교편을 잡고 있던 필자는 우연히 그때까지 이름으로만 듣고 있던 떠오르는 별 같은 그의 연주여행에 동행해 왔던 그의 가족(부인과 어린 딸)이 한인 교회를 방문하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 필자와 같은 대학의 철학과에서 대륙 철학의 권위자로 자리 잡고 계시던 조가경 박사와 필자가 한국에서 대학 교양과목으로 국문학을 배웠던 김석연 선생님 두 분 부부의 소개로 백건우씨 가족이 교회에서의 저녁식사 모임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지인들과의 테니스 게임 때문에 늦게 합류한 필자가 하나뿐인 빈자리에 앉은 게 바로 미세스 백이자 옛날 한국에서 톱스타로 유명했던 윤정희씨와 어린 딸이 앉아 있던 자리 옆이라서 생각지 않았던 영광을 차지한 셈이었다.
음악에 문외한인 필자가 피아니스트 백건우씨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꼭 피아노나 음악을 하지 않더라도 각 방면에서 자기 커리어를 쌓아가려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30년 이상 지난 바로 지난 달 뉴욕에서의 그의 연주회에 갔다 와서 그의 얘기를 우리 미주에 살고 있는 젊은 한인들에게 해주고 싶었다.
카네기홀의 스턴 페렐만 연주 홀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그는 늦은 가을 하루저녁을 꿈나라로 안내해 주었다. 잔재주를 부리지도 않고, 연주하는 곡들도 브람스와 베토벤의 소나타들을 중심으로 정통음악의 든든하고 훈훈한 아름다움을 듣는 이들에게 그는 선사해 주었다.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나이가 주는 피로를 보이지 않았고, 건반위에 혼신의 힘을 다 하는 것처럼 정열을 쏟아 넣는 음악가의 성실함을 너무나 뚜렷이 보여주었다.
그는 누가 보아도 성실해 보이도록 그렇게 그날 밤 우리 모두에게 음률로 우리 모두의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성실하게 자기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는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연주 후 그가 바르샤바교향악단과 협연한 쇼팽의 피아노곡 CD를 사오고 나서 필자는 쇼팽의 음악을 그의 고국팀이 한 연주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듣게 되었다. 백건우씨의 연주가 준 선물인 셈이다.
그날 밤 카네기홀 연주에는 청중들 거의 대부분이 젊은이들이었다. 연주자가 세션마다 마지막 노트를 치고 건반에서 손을 뗄 때까지 모두들 끈기 있게 기다렸다가 박수를 치는 성숙함을 보인 청중들은, 아름다운 선율만이 아니라 평생을 성실하게 노력해 온 훌륭한 피아니스트의 너무나 성실한 자세를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뉴욕은 워낙 클래식 음악의 청중 층이 두꺼워서 성숙한 수준을 보이지만, 청중들의 뜨거운 갈채에 와그너의 소품으로 앙코르를 선사한 이 훌륭한 만년의 피아니스트를 많은 젊은이들이 따르겠다 싶은 생각이 나면서 필자는 그가 고마웠다.
젊은이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대가가 있다는 것은 그 방면에서 공부하는 이들을 위해서 반가운 일이다. 평생 자기가 하는 일을 열심이 하는 이가 있는 곳은 외로운 곳이 아니다. 우리 같은 별 재주 없는 보통 사람들이야 따로 할 것이 없어서 한 곳에서 있지만, 젊은 시절 특출한 재주를 검증받은 이런 이들이 평생 보여주는 성실한 자세는 커리어를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너무나 좋은 본보기가 된다.
삼십년을 지나서 본 백건우씨가 계속해서 훌륭한 연주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도록 그가 건강하기를 빈다. 젊은이들은 잘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자기가 하는 일을 한눈팔지 않고 평생 한 길에서 노력하는 이들은 보기에 좋다. 그들이 자기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는 날은, 우리 모두가 아,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구나라고 생각되는 날이어서 좋다.
이종열 / 페이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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