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마지막회> 아시아나은행
2007년 5월 FS 제일은행 본점이 장소를 제공, 개인미술전을 열 수 있었다. 왼쪽부터 권길상 작곡가, 구본태 당시 FS 제일은행장, 필자, 한 사람 건너 벤자민 홍 당시 새한은행장, 이병준 전 남가주 서울대 총동창회장.
불필요한 비용지출 FDIC 지적 받아
오클랜드 지점 오픈후 사표쓰고 LA로
■ 개업 초기 상황
FDIC 보험가입 인가 일자는 1998년 12월8일이었다. 다음해 1999년 2월19일에 개업을 했다. 아시아나은행은 내가 직접 준비해서 문을 연 5개 은행 중 맨 나중 것이며 가장 작은 규모이다. 한국 외환은행과는 전혀 다른 규모의 것이었다. 그 외 캘리포니아에서 세운 한국계 은행들은 그 크기가 대충 7,000~8,000sf 면적이었다. 그런데 이번 아시아나는 4,800sf. 엄청나게 작은 규모이다.
그러나 먼저 본 대로 그동안의 은행업무 처리에 있어서 전산화를 비롯한 장소 및 인원의 절감은 예상 이상의 것이었다. 5,000sf도 안 되는 장소에서 12명의 직원(전에는 25명 내외를 요했다)으로 업무처리에 별 불편이 없었다.
업무 성적은 그만그만하다 할 정도여서 당장 성에 차지는 않았다. 그러나 실망은 아니었다.
LA와 같은 많은 손님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계를 가가호호 방문하고, 직업별 모임을 열고, 교회에도 얼굴을 보이고 전화를 걸고 하는 동안에 저절로 고객 기반이 형성될 것이다.
그리하면 미국계 은행들과 거래하던 한국 손님들이 점차 우리 은행으로 와 주리라는 당연한 기대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사회와 집행부의 희망은 하루라도 빨리 브레이크 이븐 포인트(break even point,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작으면 작은 대로 수익을 늘리고 손비를 줄여서 우선 순익을 내보자 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그 사이 좀 예외적인 수입이 있어서 2000년 2~3월에 목표 수준에 도달했다.
월간 순수익은 2,000~3,000달러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이 계속되리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한두 달 순익이 없어도 괜찮다. 한번 도달했던 수준은 그리 힘들이지 않아도 되돌아오는 법. 나는 경험에 비추어 그 후의 추의를 낙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은 업무 관계가 아닌 다른 데서 차질이 생겼다. 정치적 파탄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시아나 은행 설립 발상은 내가 Sunnyvale에 왔을 당시 이미 6~7년 전부터 있었던 것이라 했다. 그 후 시일이 경과하면서 초기 참가자들은 대부분 교체되어 이탈했다. 그러나 끝까지 버티어 남은 이가 너덧 명으로 1996년 성탄절 전날 나를 설득하러 온 이들이 그 중축이다. 이들 중 CPA인 L씨가 주동자였다. 그런데 은행이 발족할 때는 그가 아닌 전자산업에 종사해온 K씨가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 분은 세 번째의 최고한도 주식 구매자이기도 하고 은행 발기기간에도 이사장직을 역임했던 이다. 자연스럽게 이사회의 우두머리 역을 맞게 되었다.
누군가가 L씨가 그 자리를 차지 못해 섭섭할 거라 했다. 내가 ‘은행은 20년, 30년 그리고 그보다도 더 오랫동안 성장하는 기관입니다. 이사장이나 행장자리는 후에 맡을수록 보람이 있는 겁니다. L씨에게도 기회가 올 거예요’ 하고 내 생각을 이야기 했다. 이 말이 그에게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 2001 5월 주주총회
위와 같은 돌발사건은 2001년 5월의 제2차 주주총회에까지의 개업 후 2년반 미만의 사이에는 아주 예외적인 해프닝이다. 이 기간에 특기할 것은 외부이사(어느 사이엔가 이런 말이 생겼다)들의 임시 주주총회의 개최 촉구 요구다. 입씨름이 이어지는 동안에 세월은 성큼성큼 달렸다. 2001년 5월 제2차 주주총회 날이 온 것이다.
어수선한 가운데 총회는 끝났다. 결과는 아연실색 바로 그것이었다. 전 이사들은 다 사라지고 외부이사와 몇몇 낯선 이름들이 이사 명단을 메웠다. 그간의 임시 주총 개최 요구는 100% 효과가 있었다. 외부이사들이 이사회를 싹쓸이한 것이다. 새 이사진은 다음과 같다. 허철, 조성도, 최재전, 정원훈, 김성철, 김현수, 토마스 리, 방중호, 황섭배, 서니 황, 송인섭, 마이크 리.
비교를 돕기 위해 1999년 1월 은행 개업 당시의 이사진 명단을 적는다. 지대현, 조성도, 최재전, 최기호, 정원훈, 홍성옥, 김성철, 김영수, 김현수, 박영휘, 이두식, 트탄 린 키, 이완곤.
■ 새 이사회 치적
그해 5월 입성한 새 이사회는 근 반년 천지를 개벽하듯이 설쳤다. 이사회 및 집행부 간부의 교체, 정관 개정 등이었다. 이들에 따라 불급·불필요한 지출이 급증했다. 이사 정년제 연구, 대출 규정 재검토, 이사회에 보고도 안 된 인사들의 임원 초빙준비, 그들의 당국 앞 승인서류 작성, 이사 후보자들에 관한 수속, 이사회의 단독적인 사업전망의 외부 청탁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은 이미 준비되었던가. 이들 이슈들은 은행 내에서 사무적으로 취급하는 일들이다. 이들 일들을 외부에 위촉하면서 이사회는 기초 다지기에 재미를 들였던 모양이다. 은행의 모든 규정, 정책 재검을 또 하나의 전문가들에게 위촉했다.
은행의 난장판에 가장 예민한 곳이 FDIC다. 중간 검사에 나온 그들은 discretionary cost란 문구로 아시아나의 비행에 철추를 휘둘렀다. 불필요한 비용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아시아나는 2001년 2월에 오클랜드 지점을 열었다. 한미은행 시대로부터 잘 알고 지내던 제리 브라운 전 가주지사가 그 시의 시장직을 맡고 있었다. 초대했더니 손수 와서 초라한 개점식을 빛내 주었다.
그 지점의 공헌도 있고 해서 그 해 연말의 은행 총자산 2,500만달러 비해 상당한 성장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손익상황. 2000년간 50만달러 손실을 보였던 것이 2001년에는 95만달러에 달했다. 여기에도 오클랜드 지점 개설비가 큰 손실 요인이 됐다. 그보다도 필요 없는 지출을 없애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FDIC 검사 보고가 discretionary cost를 강조한 근거다.
그해 역사적인 주총 후 나는 이미 사표를 내놓고 있었다. 후임자의 FDIC 승인이 나온 것은 그해 가을, 나는 딸네가 운전해 주는 자동차에 실려 프리웨이 101의 태평양을 쳐다본다.
무지와의 싸움, 권력의 남용, 다수의 횡포, 그런 것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 그래도 내가 할 일은 있었던 게 아닐까? 우스꽝스런 그런 시나리오의 머리말을 지어본다. 할 일, 역할의 가치만을 생각해야 하는가. 힘껏 하다 못하면 어때? 사람 일이란 안 되는 것도 있지. 승자가 있으면 패자도 있는 것이 아니냐.
다음에도 두들겨 맞을 일이라도 내 양심에 꺼리지 않으면 또 치고 나가 저질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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