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함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15> 아시아나은행
나라은행은 아시아나은행 인수를 통해 현재는 미주 한인은행 중 규모가 두 번째로 큰 은행으로 성장했다. 사진은 나라은행 뉴욕지점 모습.
현지 기업가·재력가에 권유 관심 없어
결국 LA서 거액구매 목표 초과
새 은행 문 열자 평생 반려자 아내 운명
■ 주식공매
새 은행의 당면과제는 주식공매 및 이사회 구성이었다. 이들 내용은 인가 신청서에 대충 짜여 있다. 자본금 600만달러 중 9명의 발기인들이 한 절반을 담당하고 나머지를 일반 공매에 부치도록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현지에서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사실 이곳에 와 보니까 그런 희망이 오류가 아니었던 것으로 느껴졌다. 뜻밖에도 한국에서 진출하고 있는 거물급 회사도 많고 미국계 유명 회사에 종사하고 있는 한국인 고급 기술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런 곳에서의 주식공매는 LA 지역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수월하리라 보였고 너무나 당연한 생각 같았다. 그런데 DFI의 주인가를 전후하여 직접 부딪쳐 보니 예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서울지사들뿐만 아니라 전문 기술자들도 새 은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 외의 가게들이나 개인들도 힘들긴 마찬가지로 보였다.
홍보계획을 수립하고 설득에 나섰다. 서비스업 그룹에 속하는 공인회계사, 부동산 소개업자, 보험업 종사자, 언론기관 간부, 변호사 등 주식공매에 중간 소개 역할을 할 만한 이들을 몇 차례 초대하여 은행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와 더불어 이사 및 집행부들이 개인 접촉에도 힘썼다. 교회에서의 권유에도 힘썼다. 그러나 성과는 넓은 지역에 드문드문 구매 희망자가 보일 뿐 부진을 면치 못했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시 경쟁자였던 NPB는 FDIC로부터 부결 통지를 받았다고 한다. 신청 후 너무 성가시게 승인 독촉을 일삼다 보니 오히려 거부감을 샀다던가 했다. 여하간 경쟁자가 없어졌으니 우리 은행은 절대적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셈이다.
그 은행에 모였던 주주 희망자를 우리 은행으로 몰고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것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 그보다도 6~7년이나 은행을 한다고 애썼다는데 무슨 효과가 있었던가. 넋두리를 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디에서 돌파구를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FDIC의 최종 인가는 주식의 전액 판매가 조건이다. 어떻게든 주식을 매진해야 한다. 먼 거리이지만 LA도 다녀오기로 했다. 거액 주식 구매 No.1은 그 곳의 C사장이었다. 그에게 특청을 넣은 것이 효과가 있었다. 그와 더불어 거액 구매를 해둔 두 사람 외에 또 두 사람을 연결해 주었다. 이들도 비등한 큰 금액의 청약자들이다. LA의 추가 청약에서는 대부담당의 L군이 주로 중간역할을 해 주었다. 또 한 명의 간부 M군은 감독기관 등 대외 및 내부기반 준비를 담당하고 있어 은행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관계는 개업까지는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L군은 북가주에서도 두어 명 거액 청약자를 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는 동안에 북가주뿐 아니라 남가주에서도 제법 소액 구매자들이 나타났다. 그런대로 이들 소액 주식 청약자들은 전체의 30%에 달했다.
은행의 주식 매각의 견인차는 거액 주식 구매자들이었다. 1998년 4월 LA의 C사장이 최대 구매한도인 59만달러를 청약해 주었다. 나는 이것을 아시아나 은행 로켓의 제1 부스터가 성공적으로 터진 것이라 한다.
그 후 10월께 Sunnyvale의 L회장이 한도액을 구매해 주었다. 이것을 나는 아시아나의 제2차 부스터의 점화라 한다. 덕망을 겸한 국제적인 기업가인 L회장의 참여는 특히 현지에서의 반응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참여로도 아직 부족을 면치 못했으나 우리들은 이제 주식 파는 일은 매듭을 지을 수 있겠다 하는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12월에 들어서는 은행이 이사장을 맡았던 K씨가 또 하나의 한도액 구매를 해주었다. 이로써 주식매각 총액은 640만달러로 요구액을 초과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며칠 안에 FDIC 인가 통지서를 받았다.
■ 아내의 죽음
1998년 10월, 서울을 다녀온 아내가 몸이 좋지 않다고 전해 왔다. 주말에 LA에 왔더니 그녀는 보기보다도 기운이 없어했다. 집 옆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는데 그는 얼마 걷지도 못하고 길 옆 벤치에서 쉬겠다고 한다.
3가와 알바라도에 있는 세인트빈센트 병원에 예약을 해놓고 나는 서니베일에 돌아왔다.
며칠 후 검진의 결과가 왔다. 폐암이란다. 뉴욕의 딸, 이곳 딸, 아들들과 그 가족들, 외손자네, 서울 외환은행 시대에 같이 지냈던 변씨의 딸 성희양도 달려와 번갈아 시중을 들었다.
때마침 연말연시어서 은행에도 아쉬운 말 하지 않고 내가 시중을 들을 수 있었다. 그때는 며칠간 내가 아내 옆에 붙어서 간호했다. 아내의 병세는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키모테라피, 방사선 등 최신 치료방식도 다 시도했다. 하나 아무런 효과도 없어 보였다. 아니 그런 지독한 시술을 받은 것이 오히려 환자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에 더하여 치료기간에 환자가 겪은 고통이 너무나 안타깝다. 하루라도 좀 더 쾌적하게 살다 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런 고통에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완전히 마음을 비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성녀를 대하고 있구나 하고 직감했다. 그때 그녀는 자애로 가득한 하나의 투명체로 보였다.
아시아나 은행은 그녀가 투병생활을 하던 때인 1999년 2월19일 문을 열었다.
개업 후 집에 가서 그 일을 알렸더니 그녀는 없는 힘을 다해 내 손을 꼭 쥐었다. 그런대로 그가 좀 더 연명했으면 하길 바랐지만 그런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는 운명했다. 3월10일. 나와 나의 처는 1942년에 결혼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57년간, 2남2녀를 낳아 길러준 동반자였다. 반세기도 넘는 긴 세월 동안 우리 동반관계는 어떤 것이었는지 되돌아본다.
지나온 일들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다. 그러나 결국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유구한 배달민족의 행보의 한 고리를 맡았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하느님이 그런 역할의 반세기 세월을 우리에게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역할을 다 했던가?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랬습니다’ 해본다. 그러면서 저만치 서서 날 보고 있는 아내의 그림자를 본다. 실은 그 역할의 과반은 그가 해냈던 것이다. 그런 아내에게 어떤 보답을 했던가.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나와 살았던 덕으로 보람 있는 삶을 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게 없는 것이다. 대신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집안 식구 밥 벌어 먹이느라, 아이들 기르고 집안을 이끌어 나가느라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던 아내를 나는 먼저 보냈다.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지 않아 나는 은행 일에 끌려들어가 다시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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