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13> 새한은행
지난 91년 출범, 올해로 창립 18주년을 맞은 새한은행은 자산 9억달러가 넘는 한인은행 중 5위의 은행으로 성장했다. 새한은행의 윌셔가 본점 지점.
올림픽·버몬트·3가 등 약탈과 방화
한인들 자조와 노력에 경의
새한 로고 직접 디자인 자부심 느껴
■1992 LA 폭동
새 은행이 위치한 윌셔가 북쪽 웨스턴 애비뉴는 오히려 삭막한 곳이었다는 것은 먼저 말한 바와 같다.
나는 개점 전에도 그 곳을 중심으로 교포상점을 포함한 거리를 10일 정도에 걸쳐 가가호호로 방문했다.
그 곳 외에 윌셔, 올림픽, 3번가, 버몬트 등 교포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아보게 되었다.
나의 방문 명단은 50군데나 되었을까 기억된다. 그 몇 안 되는 상점가를 돌아보고 이 은행이 위치한 웨스턴 애비뉴가 가장 엉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급속히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타격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부터 왔다.
1992년 4월에 폭발한 일부 흑인들에 의한 폭동, 방화, 그리고 약탈이 그것 이다.
폭동 당일 나는 LA 공항으로 차를 달리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LA시의 남서쪽 여기저기 아마도 10군데쯤 될까.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 약탈자들이 방화한 도시가 이럴까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사흘간의 시카고에서의 미주 한인은행협회의 회의를 끝내고 돌아와 지체 없이 폭동의 자취를 휘돌아 보았다. 폭동의 발상지인 South LA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에 못지않게 오히려 코리아타운의 피해는 더 심각해 보였다.
올림픽가의 여기저기, 버몬트, 3번가의 상가들은 파괴, 약탈로 전멸상태 였다.
이들은 모구 한국인 경영 상점들이었다. 코리아타운에서 멀리 떨어진 La Brea, La Cienega, Pico 근처의 대형 마켓들도 습격을 당해 부서지고 타버렸다. 어떻게 한국인 상점만을 빠짐없이 족집게로 집어냈는지 오히려 감탄할 뿐이었다.
이런 폭동의 흔적 밑에 흐르고 있었을 민족 간의 감정적 괴리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름이 끼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다행히 흑인들과 교포 각 단체들의 효율적인 협조와 구조작업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들의 성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한의 주변과 고객
새한은행 주변의 폭동이 핥고 간 흔적은 심각했다. 유일한 새한은행 점포인 본점 영업소가 화염병의 세례를 받았다. 외벽과 창문에 폭동의 흔적이 완연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웨스턴가 맞은편 열대여섯 채의 가게가 들어 있던 상가몰이 완전히 소각되었다. 검은 쇠 뼈대들이 제멋대로 휘어져 삐져나오고 타다만 전선줄들이 안마당 광장 위에서 엉성하게 찬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음속에 그런 의문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근심은 나를 오랫동안 붙들어 놓지는 못했다. FIMA 등 정부의 재해구조 기구 외에 은행 금융기관들이 최선을 다해 줄 것이란 신뢰에서 온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도 뭔가 우리가 자조의 노력을 다한다면 우리가 당한 사태는 아무런 장해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런 자신감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로 우리들은 앞만 보고 달렸던 것 같다.
당시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은 아직 그 세력이 체감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시기였다. 교포 사업자로서 경기침체와 폭동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다행히 새한은 신설은행인 덕분에 직접적인 손실은 피할 수 있었다. 한 두어 주간 짬짬이 돌아다니면서 작성한 나의 폭동 후의 시장 방문기는 불경기와 거기에 겹친 폭동과 파괴의 흔적이 제법 상세히 담겨 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새 은행의 고객과 잠재 고객들이 당하고 있는 엄청난 시련의 기록이었다. 나는 또다시 어쩔 수 없는 회의에 사로잡혔다. 이런 상태에서 재생이니 새싹이니 하는 낱말을 생각할 수 있을까.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만났던 피해자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니 나의 의구심은 청천에 뜬 흰 구름조각 같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잿더미를 들추며 더 크고 멋진 가게를 꿈꾸고 있었다. 실제 그들은 불사조처럼 일어섰다. 나의 시장 방문기는 2~3개월마다 갱신되면서 급속히 두꺼워졌다.
한때 엉성하고 얼마간 폐허가 되었던 웨스턴 애비뉴는 신생 상가로서 면모를 일신했다.
은행 건너편 도깨비 집터 같던 상가 몰도 신장되면서 새롭게 간판을 단 가게들로 가득 찼다. 은행 근처에만 보이던 우리 말 간판이 웨스턴 북쪽 할리웃 블러버드 근처까지 번져갔다. 몇 마일에 걸친 거리에 상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것이다. 충만감이 넘친다. 같은 인상은 3번가, 버몬트, 6번가 연변에서도 느꼈다.
■은행 로고
새한은행의 로고는 내 작품이다. 행장이 뭐 그런 것까지 하느냐 하는 이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로고는 은행 건물보다도 은행 간부들의 얼굴보다도 즉각적으로 은행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로고 작성은 당연히 행장인 내 몫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미은행 것도 나의 고안이다. 새한은행 것은 ‘ㅅ’을 따른 것이고 한미은행 것은 ‘ㅎ’을 형상화 한 것이다.
왜 ‘ㅅ’이나 ‘ㅎ’을 택했느냐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영어 이름의 첫 S나 H를 로고로 써도 좋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삼성이 S를, 현대가 H자를 형상화하는 것과 같은 취지이다.
그러나 나는 두 은행 모두 우선 교포상대의 은행이라는 면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들의 시각에 호소해서 ‘ㅅ’이나 ‘ㅎ’이 더 좋으리라 판단했다.
자찬이 되지만 둘 다 잘 됐다고 생각한다. ‘ㅅ’을 그냥 쓴 것 같아 보이지만 기하학적인 도안미가 잘 풍기는 작품이다. 단순해서 좋다. 은행에서 준 이 로고가 붙은 셔츠를 입고 나가면 보는 사람들이 ‘새한은행’이다 하고 소리를 지를 때 나는 남다른 만족을 느낀다. 내 작품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상적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한미은행 20년’이란 책자에 보면 ‘ㅎ’로고는 한국의 농협 것과 비슷하고 위에 뚜껑이 있는 저금통을 상징한다고 했다. 원작자의 창작 의도와는 다르다. 오로지 자음 ‘ㅎ’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때 나는 농협의 로고를 갖고 있지 않았고 그와 흡사한 것을 만들어보자는 의도도 없었다.
저금통과 뚜껑이란 생각도 전혀 없었다. ‘ㅎ’자를 기하학적으로 도안화 하는 동안에 ‘ㅗ’부분과 동글동글한 앞부분이 분리된 것이다. ‘한미은행 20년’에는 당시(발족시) 만들었던 로고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아직 쓰이고 있으니 언젠가는 사라지는 날도 올까?
혹시 은행이 이름이 바뀌는 변천이 있더라도 이 멋진 로고는 길이 살아남았으면 하고 바란다. 이것이 그 로고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나의 소원이다. 새한의 ‘ㅅ’의 경우도 같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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