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파산하고 합병되는 사태가 벌어지기 오래전 플로리다, 팜비치의 데이빗 네프는 자신의 의류점 이름을 트릴리온으로 정했다. 부촌 중의 부촌인 팜비치의 명품 샤핑가 워스 애비뉴의 가게로는 딱 맞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재킷 한벌에 6,800달러, 와이셔츠 한벌에 800달러씩 하는, 말도 안 되는 가격표에 익숙한 고객들을 끌어 들이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아이디어였다. 지난해까지 그 아이디어는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금융위기가 닥쳐 백만장자 주민들의 자산을 수증기처럼 날려 보내더니 뒤이어 버나드 메이도프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월스트릿의 귀재이자 팜비치 주민이었던 그가 사실은 사기꾼인 것으로 정체가 드러났다.
부촌 중의 부촌 팜비치도 불황으로 침체
유대인 주민 대부분 메이도프에 투자했다 피해
명품점 늘어선 샤핑가 손님 발길 끊겨 썰렁
메이도프는 오랜 세월 탁월한 재주로 이곳 유대인 이웃들, 그 이웃들의 친구들, 그 친구들의 친구들을 사로잡아 팜비치 돈의 상당부분을 그의 폰지 사기로 빨아들였다. 이들이 평생 모은 돈이며 꿈, 수없이 많은 유산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지난해 12월 ‘허리케인 메이도프’가 휩쓸고 간 후 트릴리온은 많은 단골들을 다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메이도프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 그는 2,000달러짜리 스펀 캐시미어 바지 한 벌을 주문했었다. 트릴리온에 그에게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이탈리아로 주문을 해야 했었다.
바지가 도착하고 메이도프가 가봉을 하러 와야 했을 때 그는 이미 체포가 되었다. 네프는 그의 체포 소식을 듣자마자 가게로 달려가 메이도프의 크레딧 카드로 옷값을 결제하려고 했지만 카드는 이미 취소된 후였다. 결국 바지는 아직도 그대로 걸려있다.
이번 금융파동으로 인한 손실을 평방 마일 단위로 계산해낸 통계는 없지만 혹시 있다면 팜비치 만큼 타격이 큰 곳도 없다.
팜비치의 주민은 1만200명으로 거주 지역은 센트럴 팍의 3배가 채 못 된다. 그런데 이곳 주민들은 워낙 갑부라서 여기서 ‘백만장자’로 불리는 건 모욕이라는 조크가 있을 정도다.
갑부들이 밀집한 지역이라는 점, 주택시장 붕괴 후 부동산 가치가 대략 20% 하락했다는 점, 그리고 메이도프 사기의 직격탄을 맞았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팜비치 주민들의 평균 자산 가치 하락은 다른 어느 지역 주민들의 경우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팜비치는 외부 세계와 3개의 다리로 연결되는 섬으로 규모가 큰 게이티드 커뮤니티 같은 분위기이다. 모양은 이쑤시개 비슷해서 4개 블럭의 넓이로 13마일 정도 길게 뻗어있다. 이 작은 지역 안에 미국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모여 사는 것이다.
이 지역 부동산 중개인인 제프 크로닝어에 의하면 주택시장 붕괴에도 불구, 팜비치의 부동산 가치는 상당히 잘 보존이 되고 있다. 다른 지역처럼 절반 값에 집이 나온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팜비치 주택가를 돌아보면 경기침체 여파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여파가 드러나지 않는 것은 팜비치가 집 판매(for- sale) 사인을 규제하는 탓이기도 하다. 팜비치에서는 이 사인을 24평방 인치 이하로 규제, CD 케이스보다도 작은 크기이고 색깔도 흑백이어야 한다.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둘러보면 이 조그만 사인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현재 매물로 나와 있는 개인 주택이 260여 채에 달하는 데 이렇게 많은 집이 나오기는 거의 처음이다. 가격은 70만달러에서 부터 7,250만달러까지.
경기침체의 여파를 좀 더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텅 빈 상점들이다. 색스 피프스 애비뉴, 샤넬, 에르메스 등 명품점이 들어선 워스 애비뉴에도 빈 상점들이 등장하고 있다.
항상 예약이 차 있던 식당들도 손님이 뜸하기는 마찬가지다. 식당들은 25달러짜리 3코스 점심 특선을 내놓기도 하고, 값이 싼 메뉴들을 새로 개발해 내놓기도 한다. 고급 식당들에서도 바다가재나 캐비어 주문은 줄고 매시드 포테이토와 마카로니 & 치즈 주문은 많다.
한때 백만장자였던 어떤 사람이 지금은 수퍼마켓에서 식품을 봉지에 담는 일을 하거나 가정부로 일한다더라는 등의 이야기들도 어렵지 않게 들린다. 그러나 대다수의 주민들은 여전히 백만장자들이다. 그런데 왜 돈을 쓰지 않는 걸까?
보석상을 운영하는 스튜어트 도펠트는 말한다.
“여전히 고급 보석을 살 여유가 있는 고객들이 뭔가 죄책감을 느끼는 겁니다”
보석을 사고 싶고 살 여유가 있어도 불경기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마음이 자유롭지를 못한 것이다.
팜비치 커뮤니티는 19세기 후반 스탠더드 정유의 중역이었던 헨리 플래글러가 처음 만들었다. 이후 오랫동안 앵글로 색슨 개신교 백인(WASP)들의 지역이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엽 유대인 사업가인 A.M. 손나벤드가 지금의 팜비치 컨트리 클럽 등 상업용 부동산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뒤 이어 유대인 신흥부자들이 호텔, 비치 클럽을 만들고 유대인 골프코스도 생겼다. 유대인들이 모여들면서 기존의 백인들은 유대인들을 ‘나머지 반쪽’이라고 부르고, 유대인 밀집 지역은 ‘가자 지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개신교 백인 주민들과 유대인 주민들 간에는 항상 묘한 경쟁심이 작용해왔는 데 이번에 메이도프 사건이 터지면서 유대인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팜비치 유대인 커뮤니티에서 직간접으로 메이도프의 사기에 걸려든 사람들은 8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타격이 큰 사람들은 주택의 두 번째 모기지를 얻어 메이도프에게 투자했던 사람들. 돈을 투자했다 하면 10%나 12%가 꼬박꼬박 수익으로 들어오니 왜 안 그랬겠는가?
돈도 돈이지만 금융에 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 그래서 동경하던 사람이 사기꾼으로 드러났으니 그 정신적 충격도 대단하다. 명석한 금융 전문가가 다음날 도둑으로 드러나고, 돈이 넘쳐나다가 다음 날 크레딧이 물거품이 되며, 웬만한 자동차 한 대 값의 옷을 사는 게 멋져 보이다가 다음날에는 정신 나간 행동으로 보이는 급변의 시대를 팜비치 주민들은 살고 있다.
<뉴욕타임스 - 본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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