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기다림의 사립문을 밀고 싶습니다
겨울밤 늦은 식사를 들고 있을 당신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해묵은 안부 사이에
때처럼 곱게 낀 감정의 성에를
당신의 잔기침 곁에 앉아 녹이고 싶습니다
부당하게 잊혀졌던 세월에 관해
그 세월의 안타까운 두께에 관해
당신의 속상한 침묵에 관해
이제 무엇이든 너그러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의 바람벽에 등불을 걸고 싶습니다
박세현 (1953~) ‘겨울 편지’ 전문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불현듯 잊고 있었던 세월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오면서 내내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일. 바보처럼 굴어서 후회스러운 일. 옛날로 되돌아가서 이제라도 확인해보고 싶은 말.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다치게 했던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기도 하고, 마음이 한량없이 너그러워진다. 몇 십 년 세월이 흐르고 나니 모든 것은 하나의 그림이다.
한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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