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이외 공산품 가격도 하락 예고
주요 선진국이 일제히 경기침체로 접어들면서 원유를 비롯한 주요 원자재의 수요가 급감, 생산자물가와 소비자물가가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원유와 휘발유 등 에너지 가격이 기록적인 폭락세를 보이는 한편 구리를 비롯한 비철금속도 그동안의 폭등세를 접고 뚜렷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문제가 됐던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의 하락으로 물가상승 압력이 완화된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경기침체속에 소비자들이 아예 지갑을 닫아버리면서 주요 생필품의 가격까지 덩달아 하락하는 현상을 초래,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분위기가 됐다.
디플레이션은 일단 본격화하면 뾰족한 대응책이 없다는 점에서 인플레이션보다 더 치명적이다.
디플레이션이 초래하는 폐해는 1930년대 대공황으로 수년간 미국이 극심한 불황을 겪었던 경우와 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대표적이다.
과거의 디플레이션 상황이 코앞에 닥쳤다고 호들갑을 떨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선진국 시장에서 발표되는 물가지표를 추적해보면 디플레이션의 초입 단계를 나타내는 징후들이 엿보이고 있다.
19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10월 소비자물가는 전월 대비 1.0% 하락했다. 소비자물가 통계가 편제되기 시작한 1947년 이후 최대의 하락폭이다.
특히 8월 이후 석달 연속 하락세를 보임에 따라 물가하락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 추세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소비자물가가 이처럼 하락한 것은 휘발유 등 에너지가격이 하락한 것이 주된 요인이다. 휘발유 가격은 14.2%나 떨어져 사상 최대의 폭락세를 기록했으며 11월에는 추가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전날 발표된 생산자물가 역시 전월 대비 2.8% 하락해,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물가지표는 최근의 추세를 살펴보려면 전월 대비 증감률을 주목해야 하지만, 최근 1년사이의 추세도 함께 지켜볼 필요가 있다.
10월 소비자물가는 작년 같은 달에 비해서는 3.7% 상승, 최근 1년간 물가상승 폭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가격변동이 심한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는 1년전에 비해 2.2% 올랐다.
비록 최근 3개월간 전월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이어갔지만 작년 같은 시점에 비해서는 물가가 크게 올랐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원유가격이 급등락을 거듭하는 불규칙 요인이 개입돼 있다. 올해 상반기에 원유가격이 배럴당 150달러를 위협할 정도로 급등했던 효과가 상당부분 반영돼 있는 데 비해 하반기의 유가 급락 효과는 아직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년전에 비해서는 3%대의 높은 물가상승률을 나타내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디플레이션 위기에 놓였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근원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월 대비로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월스트리트의 전문가들은 미국의 10월 근원 소비자물가가 0.1%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여타 공산품의 물가는 소폭이나마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근원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예상과 달리 -0.1%로 발표됐다.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여타 공산품의 가격이 전월보다 하락한 것이다.
이는 소비자들이 지출을 줄임에 따라 제조업체와 유통업체들이 가격인하를 통해 재고부담을 덜어내려는 현상이 촉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기침체로 자산가격이 하락하면 가계는 추가 가격하락을 기대하면서 소비지출을 미루게 되고 이는 또다시 가격하락을 압박하게 돼 생산과 수요를 감축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것이 디플레이션이다.
앞으로 추세적인 변화를 지켜봐야겠지만 근원 소비자물가가 하락세를 보였다는 것은 디플레이션의 초입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만만찮다.
한편, 영국의 10월 소비자물가는 4.5%나 하락, 16년만에 가장 큰 폭으로 내렸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문제였지만 내년에는 디플레이션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장클로드 트리셰 총재는 18일 “아직 유로존(유로화 사용 15개국)에서 디플레이션의 경향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말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디플레이션 현상에 대한 우려로 이에 대한 모니터링이 이뤄지고 있음을 시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선진국 전반에 점차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sh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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