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우연의 일치라고 하겠지만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해결하기 위한 해법으로 ‘자율규제협정’이 본격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계 전 미국 연방하원의원의 기고문이 국내에 발표된 다음이다. 김창준 전 미 연방하원의원은 ‘재협상보다는 자율규제협정(VRA) 요구해야’ 라는 제목의 의견을 기고했다. 당시 정부가 현 사태의 심각성을 미처 못 깨닫고 안이한 대응을 하고 있을 때 그는 광우병 위험이 없다고 아무리 설명해봤자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다며 한국 정부를 비판했다. 이어 1981년 일본이 미국과 맺었던 자동차 수입에 관한 자율규제 조치를 소개하며 미국 쇠고기 문제에 대해서도 이 방안을 적용하는 것이 ‘윈-윈 게임’이라고 강조했다. 이 기고문이 발표된 후 워싱턴 DC의 주미대사관 관계자가 김 전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내용이 신속하게 정부로 보고됐다. 이어 서울을 방문한 김 전 의원은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를 면담, 자율규제협정을 설명하고 미 정치권의 동향도 전달했다. 한국의 방송과 다른 신문들도 그가 제시한 해법을 주목했고, 그런 가운데 자율규제협정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정부가 현 사태를 풀기 위한 방안으로 자율규제협정을 선택한 상황은 나중에 공개가 되겠지만 김 전 의원의 기고가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국가를 뒤흔들 정도의 심각한 사안에 대한 해법이 정작 정부 내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제안되는 상황은 이번 사태의 해결과는 별도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젠 이와 유사한 사태가 재발할 경우에 대비, 각국의 사정에 정통한 공무원을 몇 명이나 확보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고 있느냐에 주목할 때가 됐다.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 이론으로 유명한 한스 J. 모겐소(Morgenthau) 전 시카고대 교수는 국력의 9가지 기본 요소 중 두 가지로 ‘정부의 질(質)’과 ‘외교의 질’을 꼽았다. 그는 여론은 책임 있는 정부에 의해 끊임없이 창조되고 재창조되는, 동태적이고 항상 변화하는 실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며 정부 관계자들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강조했다. 또 유능한 외교는 그 나라 국력의 구성 요소를 모조리 결합했을 때 흔히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국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준다며 외교를 중시했다. 1년에 최소한 수천만원 이상의 세금을 써 가며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2년가량 연수한 대한민국 공무원은 부지기수다. 외무·행정고시에 합격한 공무원들은 정부의 수요보다는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연수지를 선택, 자신들의 학력을 석사 또는 박사로 늘려왔다. 문제는 이런 식의 연수가 공무원 개인의 경험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됐을지 모르나 외교와 협상에서 정부의 총체적 역량을 늘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도서반환 협상,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지원조건 협상, 대우자동차 매각 협상에 이어 다시 미국 쇠고기 협상에서 외국의 대학에 협상 실패 사례를 제공하고 있다. 21세기의 국가경쟁에서 외교와 협상은 외교부 공무원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수출로 먹고살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는 외교와 협상이 모든 공무원의 필수과목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이번 사태의 중대한 교훈이 될 수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