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개봉해 흥행에 성공한 덴젤 워싱턴과 러셀 크로우 주연의 액션 대작 ‘아메리칸 갱스터’에는 한인 화가 이늠이(사진)씨의 작품 8점이 소품으로 사용되었다. 톱스타들의 얼굴과 연기를 보기에도 바쁜 관객들에게 스쳐지나가는 그림 소품이 큰 의미가 없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벽에 붙은 달력 하나, 신문지 조각 하나도 손수 챙겨 ‘봉테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봉준호 감독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품은 장면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영화에서 사용된 이늠이씨의 그림은 삶과 죽음을 흑백으로 표현한 강렬한 작품들이다. 슬럼에서 자라 거물 갱스터가 된 덴젤 워싱턴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작가는 아스토리아 아파트에 거주하던 시절 이웃 노인의 죽음이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아랫층에 혼자 살던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몰라 시체가 썩는 악취가 나서야 발견됐다.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고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과 흰색으로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계속 그리게 됐다.” 이씨의 작품은 이후 3편의 영화에 더 사용됐다.
영화 속 덴젤 워싱턴만큼은 아니지만 이늠이씨 역시 무척이나 ‘터프’하게 살아온 전형적인 ‘억센 경상도 여자’다.
경상북도의 산골 초가집에서 태어난 이씨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어려서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 이상 가르치려고 하지 않던 부모 밑에서 사촌의 교복을 뺏어 입으며 중학교를 졸업했고 실업고등학교까지 마쳤다. 몰래 등교할 때마다 머리채를 잡혀 집안으로 끌려가기 다반사였지만 불굴의 의지로 효성여대 미대를 4년 전액 장학금으로 졸업했다.
부산에서 미술 학원을 4년간 운영했지만 “목이 안 좋아” 문을 닫은 뒤 96년 남은 돈을 가지고 무작정 뉴욕에 유학을 왔다. 이후 2005년 프랫대학교에서 MFA 학위를 받은 뒤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이씨의 작품이 늘 어두웠던 건 아니다. 현재의 맨하탄 공장 건물을 스튜디오로 얻은 뒤에는 “세상이 모두 아름다워 보여서” 꽃을 소재로한 화려한 작품을 한동안 그렸다. 그러다가 남편의 가족이 이라크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
을 계기로 다시 어두운 분위기의 ‘생존(Survinal)’ 연작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97년 만난 남편은 후세인 치하에서 미국으로 탈출한 이라크 시인으로 현재는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며 이씨의 가장 큰 조언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늠이씨는 최근 한국의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문소설 ‘생존의 힘(Power of Survival)’을 마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활자 중독이었다는 이씨는 “소설을 써보니 너무 재밌고 스스로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 단편과 시나리오도 계속 작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직 화가로서도 만개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사변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씨는 하고 싶은 일에 ‘꽂히면’ 좌우는 둘러보지 않는 에너지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림은 이씨의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이 최초로 선택한 매체였을 뿐이다. 스스로 “장애인 야학 교사로 평생 봉사 할 생각도 있었다”고 말하는 이씨가 몇 년 후 소설가로 화려하게 등장하더라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박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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