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박사는 한국인 최초의 미국시민, 미국 의사, 미국 공무원로서 미국사회에 기여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권태면 총영사는 16일 미주한인봉사단(이사장 홍일송)이 주최한 ‘서재필 박사에 대한 평가와 한인동포 사회에 대한 기대’를 주제로 한 강연회에서 “서 박사는 최초의 한국계 시민권자로 미국과 한국에 각각 기여, 미주 동포사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총영사관 앞에 서재필 박사를 세우게 됐다”면서 “서 박사는 이중적인 정체성을 갖는 한인 2세 및 3세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 개화기때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 박사는 1896년 귀국,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사상을 민중에 보급했다.
권 총영사는 “서 박사는 국가적 차원에서 한국에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토론문화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으로서 ‘마음의 독립’이 진정한 독립임을 고취시켰다”면서 “최초의 민간 한글전용 신문인 독립신문 발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으로 조선의 독립에 기여 했다”고 말했다.
서 박사는 미국과 스페인 전쟁때는 군의관, 제 2차 세계 전쟁 때는 징병 검사관으로 미국사회에도 기여했다.
권 총영사는 “총영사관 건물 앞 서 박사의 동상이 세워진 곳은 미국 정부의 부지이기 때문에 DC의 역사위원회, 예술위원회 등 여러 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 했다”면서 “서 박사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군의관으로서 활동하는 등 미국과의 관련성이 있었기 때문에 동상 건립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권 총영사는 이어 “서 박사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이 따른다”면서 “그는 최초로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 사람이며 조선독립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탕진, 최초로 미국에서 파산신청을 한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서 박사는 1896-98년 독립신문 발간, 독립협회 창립 등으로 자주, 민권 운동을 전개했으며 배재학당 강의 등을 통해 이승만, 안창호, 이상재 등을 제자로 육성했다.
권 총영사는 “서 박사는 1919년 3.1 운동이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미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이승만 박사와 함께 제 1차 미주한인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여론을 조성했다”면서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정보국을 조직하고 코리아 리뷰 등을 발간, 한국문제를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1947년에는 미군정 최고고문 겸 과도정부 특별 의정관 자격으로 귀국방한, 통일된 민주 독립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권 총영사는 이날 개화기 당시, 수구파와 개화파의 갈등, 만민공동회 등 독립협회의 활동과 이로 인한 이승만 박사의 5년간 옥고, 이승만과 서재필 박사와의 관계 등을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며 서 박사를 소개했다.
권 총영사는 “외교관 생활에 있어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은 중요하다”면서 “이런 이유로 95년부터 이승만 박사, 서재필 박사 등에 대해 연구했으며 앞으로 책도 출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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