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시 방문을 미니, 먼동은 아직, 쌍봉 너머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밤의 끝자락이라, 그런대로 희미하게 보이는 노스님의 방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걸망을 등에 멘 채, 맨땅 그대로 삼배로써 예를 올리고는, 고양이 뒷걸음으로 가만가만 암자를 벗어났다.
한껏, 피어오른 산안개가 골에 가득하다. 향내처럼 스며드는 새벽안개 내음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몇 날을 하늘이 뚫린 듯 장대비를 쏟아 부은 뒤 끝이라, 산의 가슴을 가르고 흘러내리는 우레 같은 물소리에, 꼴짜기는 온통 아우성이다.
아직은 어두워 발밑을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어도, 수년을 다람쥐처럼 오르내린 길이라, 발 딛는 곳이 바로 길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안개구름은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대며 달려든다. 가야할 길이 꽤나 되어, 안개를 헤쳐 가는 발걸음이 한껏 바쁜데, 벌써, 걸망 쪽 적삼은 땀이 솟아 촉촉하다.
어제 저녁나절에는 삼년 전, 산 살림을 시작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스님께 머리를 세웠다. “그 동안 한 번도 도를 풀어내신 적이 없습니다.” 볼멘소리로 작정하고 말머리를 잡았다. 한참을 부채 품만 파시던 스님께서, 그윽이 말을 받으신다. “나는 한 순간도 도를 묶어 논 적이 없으이.” 잠시 헤매는 나를 두고, 노래하듯 말끝을 이으신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고, 밭 갈고 김매고, 도랑치고 게 잡고, 마당 쓸고.” 불쑥, 말허리를 잘랐다.
“저도 스님처럼 살림 살았습니다!” “그러한고?”
어느 듯, 산허리를 감아 도니 동해가 열린다. 이제 막 햇덩이가 용솟음치려는 듯, 홍시빛 파도를 용암처럼 토해내고 있다. 벌써, 골짜기의 저 편은 꽤나 멀어져 있고, 물살도 힘이 쳐져 느릿하다. 그러나 워낙에 깊은 골인지라 산 아래 마을까지는 아직도 아득한데, 돌연, 벽력같은 소리가 새벽을 찢는다.
“이놈아! 지엄아! 이 칠통 같은 놈아!” 소리가 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를 건너 맞은 편 큰 바위 위에, 우뚝한 낯익은 모습이 눈을 파고든다. 순간, 두 손으로 무엇인가 이 쪽으로 던지는 듯한데.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바로 뒤따른다. “옜다! 도 받아라. 이눔아! 옜다! 도 받아라!”
옜다도받아라이눔아옜다도받아라이눔아옜다….
소리는 소리를 물고 산의 속살을 헤집는다. 날 선 도끼에 장작이 쪼개지며 날아가듯, 찰나에 머리를 가르고 지나가는 한 줄기 새파란 섬광. 스르르 무릎이 꺾기고, 노스님을 향해 엎어진 몸을 당최, 추스를 수가 없다.
우리는 제대로 차 한 잔을 마시지 못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밥 한 숟갈을 입에 넣지 못합니다.
차와 하나 되지 못한 채, 온갖 잔머리를 굴리고 잡생각을 타서 함께 마시느라, 향과 맛은 이미 멀리 있습니다. 길은 높고 먼 곳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말 속에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 내가 딛고선 발아래를 한 번 비추어 보면, 거기 목숨 걸고 그토록 찾던 도가 찬란한 빛을 숨기고 있는 것을. 그래서 어느 노 선사는 길을 묻는 수행승에게, 이다지도 담담합니다.
“차나 한 잔 드시게”
박 재 욱
(관음사 상임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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