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모니카의 브렌트우드 웨스트 살롱에서 단골손님의 손톱을 다듬고 있는 투안 레.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난민으로 미국에 도착하고 몇 달 후부터 매니큐어 미용사로 일을 시작했다.
매니큐어 미용업계 장악한 베트남 커뮤니티
“영어 못해도 손재주만 있으면 된다” 이민자들 환영
70년대 한 여배우가 난민 여성들 도운 것이 계기
‘네일 살롱’이 베트남계 비즈니스로 굳어진 지 오래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매니큐어 미용사의 80%가 베트남계이다. 샤핑몰마다 자리 잡은 네일 살롱에 들어가서 베트남계가 아닌 타 민족 미용사를 만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무대를 전국으로 옮겨도 전체 네일 살롱 종사자의 43%는 베트남 이민자들. 네일 살롱이 베트남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의 수단이 되고 있다.
지난 연말 미국에 도착한 49세의 베트남 여성 호아 티 레는 오렌지카운티에 거처를 마련하자마자 미용학교로 직행했다. 캘리포니아의 네일 미용업에 대해서는 미국에 오기 전부터 들어왔던 터였다. 먼저 온 언니 오빠들 모두가 매니큐어 미용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매니큐어를 해라. 그게 쉽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말을 따랐지요”
레의 가족 6남매는 현재 모두 네일 살롱에서 일하고 있다.
이민자 그룹들은 미국에 정착하면서 틈새시장을 공략, 업종과 관련한 스테레오 타입들을 만들어 왔다. 코리안 하면 세탁업, 캄보니아계 하면 도넛 샵, 인도계 하면 모텔 업 등이다. 그 옆에서 베트남계는 매니큐어 시장을 장악, 전국의 네일 살롱이 베트남계의 손에 움직이고 있다.
그 결과 매니큐어는 과거 부유층만이 누리던 사치에서 일반 미국인들이 큰 부담 없이 누릴 수 있는 호사가 되었다. 값이 싸진 것이다. 지난 1970년대 미국에서 매니큐어 한번 받는 데 드는 비용은 최고 60달러였다. 하지만 베트남계의 네일 살롱 진출 바람이 불면서 저임금에 기꺼이 일하는 난민들 덕분에 가격이 하락, 지금은 15달러에 매니큐어와 패디큐어를 모두 받을 수도 있다.
네일 미용업은 베트남 이민자들에게 쉬운 성공의 길이 되고 있다. 기술훈련이 까다롭지 않은 데다 영어를 잘 못해도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도 많아서 갓 이민 온 이민자가 미용학교에서 매니큐어 기술을 채 배우기 전부터 친척들이 하는 미용실에서 그가 자격증 따기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중서부나 동부의 네일 살롱들은 오렌지카운티 베트남계 신문에 미용사 구인 광고를 내고 있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서는 베트남 어로 매니큐어 미용사 자격증 시험을 볼 수가 있고, 업계 잡지는 호화 장정의 베트남어 판으로 나오고 있다.
베트남계가 매니큐어 업에 종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20명의 베트남 여성들이 새크라멘토의 난민 수용 천막촌에 도착했다. 베트남에서 교사, 자영업자, 혹은 공무원으로 일하던 여성들이었다. 이들이 암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나타난 사람이 할리웃의 여배우 티피 헤드런이었다.
헤드런은 며칠이 멀다하고 난민촌을 방문, 그들의 피눈물 나는 이야기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그들을 도울 길을 모색했다. 그때 헤드런은 이들이 자신의 매니큐어 칠한 손톱에 몹시 끌려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 78세가 된 헤드런은 말한다. “이 여성들이 손재주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이들이 매니큐어를 배우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헤드런은 자신의 매니큐어 미용사를 일주일에 한번씩 비행기로 날아오게 해서 그 여성들에게 매니큐어 기술을 가르치게 했다. 그리고 인근의 미용학교를 설득해 그 여성들을 가르치고 일자리 찾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다.
베트남에서 고등학교 교사였던 투안 레는 난민촌 도착 4개월 후에 매니큐어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 상황에서는 어떤 직업이든 가르쳐주기만 하면 감지덕지 할 때였다.
헤드런은 산타모니카의 한 네일 살롱에 레를 취직시켜 주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골도 없는 데다 아직 매니큐어가 유행이 아니었고 손톱 손질용 도구를 찾기도 어려웠다.
레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고등학교 동창 한명이 그 분야로 뛰어 들었다. 키엔 엔구옌과 그의 남편 디엠이었다. 이들은 몇 년 후 직접 네일 살롱을 개업, 미국에서 베트남계가 운영하는 최초의 네일 미용실 중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에서 해군 중령이었던 디엠은 직접 미용학교에 등록해서 공부를 했고, 친구들에게도 네일 미용업을 적극 권했다. 그리고 1987년 엔구옌 부부는 오렌지카운티 리틀 사이공에 미용학교를 개설, 베트남어로 강의를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런 성공담이 퍼져나가면서 점점 많은 베트남계가 네일 미용업에 종사, ‘해피 네일’과 같은 체인은 남가주의 샤핑몰마다 들어가서 40여개가 운영되고 있다. 비슷한 체인들이 중서부와 동부에서도 생겨나고 있다.
한편 고급 살롱들과 경쟁을 하던 베트남계 살롱들은 실패를 했다. 영어 대화 기술이 부족한 데다 사업 능력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가격을 더 낮추는 할인 살롱도 생겨났는데 이런 곳에 가면 매니큐어가 10달러에 불과하다.
매니큐어 일에 모두가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근무 시간도 길고 보수는 들쭉 날쭉이다. 베트남에서 기대치가 높았던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직업이기도 하다. 베트남계 네일 살롱은 비위생적이라는 평판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발 스파가 불결해서 고객들이 박테리아에 감염된 사례가 몇몇 베트남계 살롱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비율은 업계 전반으로 볼때 특별히 높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베트남계의 네일 살롱 업은 계속 번창할 전망이다. 베트남으로부터 이민이 계속 들어와서 늘어나는 네일 살롱의 인력을 보충해 주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네일 살롱을 첨단의 종합 미용실로 바꾸는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멋진 실내 장식과 함께 얼굴 마사지, 지압 서비스 등을 함게 제공하는 데 대개 베트남계 2세들이 주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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