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음의 소리 / 윤선중 부교무(원불교 샌프란시스코 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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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이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다. 긴 겨울 동안 그 참을 수 없는 생명력을 숨겨두었던 이들이 하나 둘 깨어난다. 그냥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 깊이 감춰두고, 저장해 두었던 경이로운 색과 향기로 피어난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노란 들꽃이 너무도 신기하여 길을 걷다 말고, 한참을 가만히 앉아서 보았다. 투명하고 맑은 햇살 아래 반짝이는 생명들의 노래. 4월. 이 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지만 4월이 되면, 특히 라일락 향기가 진해 지기 시작하는 요즘이 되면, T.S. 엘리엇이 노래했던 황무지의 첫 구절이 떠오른다. “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왜 시인은 이렇게 경이로운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을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4월은 원불교에 있어서 가장 큰 축제의 달이다. 93년 전, 원불교를 연 소태산 대종사께서 큰 깨달음을 얻어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모든 생명들에게 모두가 부처이고, 모두가 은혜이다는 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달, 잔인한 달, 희망의 달. 무엇이 4월을 이러한 수식어들로 꾸미게 하는 것일까?
시인은 계속 노래한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아, 그렇구나. 매서운 겨울 바람에 대지 깊숙이 숨어버린 씨앗들, 아니면 땅속으로까지는 아니지만, 땅 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눈을 이불 삼아 추위를 견디는 생명들. 오히려 뭍 생명들이 이렇게 안으로 침잠하는 순간엔, 나 하나의 마음이 깨어나지 않음이 이상하지 않다. 슬프지 않다. 오히려 안도감이 든다 할까.
하지만 이제, 겨울 내, 안으로 기다렸던 생명의 노래를 마음껏 따듯한 햇살 아래 틔워내는 이 4월에, 아직도 겨울인 것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마음이 어둠에 가리워져 있을 때, 아니면 생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패, 탄압, 사기, 미움, 죽임 등의 슬픈 소식이 사회 곳곳에서 들려올 때, 아! 이보다 잔인한 달이 있을까. 엘리엇이 말한 4월은 어쩌면 ‘잔인한’ 이라는 수식어 속에 이 경이로운 자연이 보여주는4월의 생명의 노래가 더 부각되는 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깨어나야 할, 우리의 마음이 깨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에 더 경각심을 주는 지 모르겠다.
93년 전 소태산의 깨달음의 의미는 “깨달았다”는 데 있지 않다. 소태산은 자신의 깨달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진행형이 되어 전달되어 그 기쁨의 소식을 다 함께 즐기고자 간절히 소망했다. 자연이 보여주는 4월의 생명력처럼 말이다. 비가 오면 활짝 피었던 빨간 튤립이 가만히 얼굴을 닫아버린다. 때가 되면 나를 접을 줄 알고, 때가 되면 활짝 필 줄 아는 이 우주 안에 가득한 생명력을 이제 내 안의 깨침으로 승화시킬 때이다. 자연스럽게 말이다. 4월은 단순히 아름다운 달인가, 아직도 잔인한 달인가, 아니면 희망의 달인가 가만히 눈을 감고 나를 들여다 본다.
◈ 알립니다
이번주부터 종교면에 원불교 샌프란시스코 교당 윤선중 부교무의 글을 게재합니다. 윤 부교무는 필라델피아 원불교선학대학원을 졸업후 상항교당에 부임하여 영어권 교화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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