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가다 보니까 멀리 한 문루가 보인다. 온통 전쟁이 할퀴고 간 흔적뿐이다. 그 가운데 문루는 홀로 서 있다. 그 색깔이 그런데 그렇다. 온통 까만색이다.”
“마침내 그 문루의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현판이 보인다. 조양문(朝陽門)이다. 아! 그 유명한 조양문은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었구나. 더 가까이 다가간 순간 다시 놀랐다. 검정색을 칠한 게 아니었다. 온통 파리 떼에 덮여 검은 색으로 보였던 것이다.”
왜정 때 일본군으로 징용된 한 옛 문인이 북경 입성기로 남긴 기록이다. 천자의 도시 북경에는 수많은 대문이 있다. 황성에만 4개의 문이 있다. 내성에는 9개 문이 있고 외성에는 7개의 문이 있었다.
내성의 9개 대문 중 하나가 바로 조양문으로 조선조의 사신, 선비, 장사꾼 등은 주로 이 대문을 드나들며 천자의 도시가 지닌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연암 박지원이 남긴 기록도 그 중의 하나다.
“…노하, 통주를 거쳐 북경까지 만 엿새 동안 3백여리를 말을 달렸다. 그 번영은 말할 나위가 없다. …통주에서 북경까지 50리 길은 석판의 탄탄대로에 부딪히는 쇠바퀴소리가 귀를 찢었고 영통교에서 조양문에 이르는 직선의 운하에는 각양의 작은 배들로 연이어 있었다.” 동쪽에서 온 손님들에게 천자 도시로서 위엄을 과시하던 대문이다. 그 조양문이 박지원이 다녀 간지 200년도 못된 후에는 파리 떼로 덮여져 망국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의 건축에 있어 대문은 그저 출입을 위한 용도의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왕성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때문에 도성 대문의 역사는 바로 그 왕조의 영광과 비애를 그대로 상징하기도 한다.
서울의 남대문도 그렇다. 그 대문이 세워진 건 태조 때다. 숭례문(崇禮門)으로 이름 지어진 이 대문이 조선조의 대표적 대문으로 중건된 때는 조선의 국력이 가장 충실했던 세종 때다. 땅을 돋우어 지반을 높여 증축함으로써 왕권의 절대성을 과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후 남대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외침 속에서도 조선 도성의 수문장으로서 그 위치를 지켜왔다. 이 남대문이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 건 일제침략 이후다.
훗날 대정천황이 되는 일본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런데 숭례문이 문제였다. 일본 황태자가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에서. 결국 성벽을 잘라내 그 옆길로 들어갔다.
남대문은 그 같은 비애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켜 왔다. 그러다가 2008년,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환갑이 되는 해 2월10일과 11일 미명에 걸쳐 불에 타 자취를 감추었다.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보 1호가 60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불꽃 속에 사라진 것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저 민망하고 창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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