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전‘올림픽가의 감격’생생”
당시 전재산 5,000달러 기부
주위서 ‘돈키호테’ 취급 받기도
애국심·타운사랑 정신 계승을
“60년대 일본타운에서 ‘니세이(2세) 축제’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너무 부러워서 ‘의욕’만 가지고 한국의 날 축제를 시작한 것이 벌써 34년 전입니다. 1974년 제1회 한국의 날 축제를 시작했을 때 ‘니세이 축제’는 34회째였는데 올해로 한국의 날 축제가 34회를 맞았습니다”
LA한인축제재단 김진형(사진) 명예 대회장에게는 ‘한국의 날 축제 창시자’라는 대명사가 따라다닌다. 김 대회장이 1972년 코리아타운 번영회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면서 상점마다 한글간판을 손수 써주며 한인타운의 윤곽을 잡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김 대회장은 한국의 날 축제는 한인 이민역사의 이정표라고 말한다. “한글간판들이 내걸리면서 한인상점이 하나 둘씩 늘기 시작했고 LA에 서서히 한인타운이라는 ‘우리들만의 땅’이 만들어 졌습니다. 한인타운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축제의 한마당을 펼쳐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처음에는 김 회장의 축제 아이디어를 ‘돈키호테 발상’이라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축제 준비를 위해 당시 전재산 5,000달러를 기부한 김 대회장은 독불장군은 보통이고 정신이상자라는 비난까지 감수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제준비에 몰두했다.
1974년 11월3일. 제 1회 한국의 날 축제가 올림픽 블러버드에서 막을 올렸다. 퍼레이드 시작 1시간 전인 2시까지도 거리는 한산했다. 김 대회장은 “퍼레이드 30분을 남기고 갑자기 한인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한인들의 물결이었죠. LAPD가 3,000명 인파를 예상하고 축제허가를 내주며 2명의 순찰인원을 배치했는데 결국 3만명의 인파가 연도에 늘어서자 경찰이 저에게 마구 화를 내더군요. 그래도 너무 감격해서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LA의 한인 인구가 5만명을 넘지 않던 시절이었다.
축제를 개최한 경험이 없다보니 각종 해프닝도 많았다. 축제가 11월3일에 열린 것도 이날을 한국의 개천절로 착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김 회장은 “축제 준비에 정신이 없어 나중에야 개천절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웃었다.
퍼레이드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진행하다 보니 사진기자들은 “해를 보며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원성을 높이기도 했다.
축제를 왜 하느냐며 반대와 비난을 서슴지 않던 단체장들이 오히려 서로 오픈카를 타고 퍼레이드에 나서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는 촌극도 벌어졌다.
왜 축제를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김 회장은 “애국심 때문”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한다. “한국을 알리고 싶었어요. 한인들이 미국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우리만의 목소리를 찾으려면 한인들의 힘을 과시할 큰 잔치가 필요했습니다”고 설명한다.
‘축제 아버지’의 당부는 “축제의 외형이 커지면서 축제를 돈벌이나 힘을 과시하는 기회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축제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국의 날 축제가 애국심과 봉사정신, 그리고 한인타운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된 것임을 꼭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연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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