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배우며
국민학교 3학년인가 4학년 때 추석에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우리 집안 선산이 있는 수유리로 차례를 지내러 갔다. 그때는 미아리 고개만 넘으면 서울은 끝나고 들판과 논밭이 길 양쪽에 펼쳐져 있었다.
우선 오래 선산을 돌보아 온 마름의 집으로 가서 차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을 보았다. 그 집에는 내 또래의 아들이 있어서 나는 그 애와 함께 제사도 지내기 전에 대추를 몰래 먹고 나무에서 따 놓은 밤을 막대기를 가지고 발로 어겨 꺼내기도 하고 놀았다.
차린 음식을 지게에 지고 야산으로 올라갔는데 아버지가 여기 저기 봉분을 가리키시며 “이곳은 할아버지 할머니 묘고, 저기는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묘다” 하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두세 군데에 상을 차리고 절을 했다. 그리고 묘를 돌본 후 야산과 나무들을 둘러보며 내려와서 마름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하루를 보냈다.
내가 단 한 번 가 본 이 선산은 얼마 후 신일 고등학교 교장에게 팔렸다. 그 땅을 사서 학교를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 형제는 아홉 분이었는데 모두 집안에 빚들이 좀 있고 해서 선산은 팔고 묘는 파서 화장을 했다.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학교 뒷산이 우리 선산이니 기념이 되고 다행이다” 하셨지만 어린 내가 보아도 후손들이 마지막 남은 선산을 못 지키고 팔아서 돈을 나누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었다. 그때에도 벌써 미아리 밖은 개발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후에도 내가 수유리를 지날 때마다 신일 고등학교 입구에서는 이제는 빼곡한 빌딩 사이로 보이는 뒷산을 보며 그 생각을 한다.
작가 이태준과 박태원이 고생 끝에 성북동과 돈암동에 터를 사서 집을 짓던 일제시대에는 그곳이 또 개발 지역이어서 청부업자가 사채로 빌려 치른 돈을 다 받고 집은 날림으로 지어 주는 등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신촌 로타리도 거의 서울의 끝이어서 제2 한강교를 지나면 완전히 시골이었다.
80년대에 벌판이던 강남이 오늘의 고급 빌딩 도시와 아파트촌이 되어 부동산 투기의 근원지가 된 것도 사실은 서울의 역사에서 보면 새로운 일이 아니다. 옛날에 짓던 개인 주택들이 오늘날에는 고층 아파트와 빌라 연립 주택이 되어 도시 경관이 달라진 것뿐이다. 고속 도로 변에 펼쳐진 흙 벌판이던 분당이 순식간에 아스팔트 바닥의 고층 빌딩으로 꽉 찬 대 소비 도시로 바뀐 것을 보고 아연실색을 한 나는 그 비싼 땅값과 집값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전형적인 전원 용인도 요새는 대도시에 준하는 주거지가 되었다. 그래도 역사가 없는 도시에서 책을 사려면 역시 서울 시내 광화문까지 나와야 원하는 책을 언제라도 찾을 수 있으니 개발의 속도와 소비문화의 수준도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외곽 도시에서 서울까지 오려면 교통편이 불편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 아침저녁 출퇴근이 어렵고 고달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집(아파트)을 마련하려고 너도나도 개발 지역에 투자를 하니 부동산 투기의 열기는 그칠 날이 없다. 언제나 빚을 얻지 않고도 마련할 수 있는 돈으로 집을 사거나 세를 들 수가 있을까? 건축업자, 부동산업자, 사채업자, 시 관리들도 잘못이 있지만 너무도 이 개발지역으로 몰려가는 시민의 의식 구조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내 집 마련 생각도 있지만 개발 지역에서 재산을 만들고 그것으로 돈을 벌려는 욕심이 역시 작용하는 것 아닌가?
아무 데서라도 자기가 할 일을 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집에, 투기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고 초연히 같은 곳에 사는 지혜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전세 값은 오르고, 재개발을 하고, 도심 개발을 하여 쫓겨나야 하니 한심하다.
이연행 불문학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