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수 변호사의 가족들. 오른쪽 하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작고한 어머니 민부귀 여사, 민병수 변호사, 부인 캐롤 앤 민, 큰아들 민덕기, 작은아들 민선기.
‘현역 최고령’ 민병수 형법전문 변호사
“한인사회 위해 일하는 게 가장 기쁨”
올해 나이 73세로 현직에서 활동하는 최고령 한인 형법전문 변호사인 민병수 변호사.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어느새 고희를 훌쩍 넘었다는 사실조차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그에게서는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은 정열이 넘쳐난다. 또 손자뻘인 2세 젊은이들과도 열린 마음으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소탈함은 그만의 매력이다. 70년대 법조계에 입문한 올드타이머 변호사이면서 현재 남가주 미주한인재단 회장으로서 이민사 보존과 발굴, 그리고 후세들에게 역사를 심어주기 위해 발로 뛰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민 변호사를 만나 그가 걸어온 길과 한인사회의 미래를 위한 비전을 들어봤다.
‘초대 LA총영사’부친따라 1948년 미국에
주경야독 75년 가주 3번째 한인변호사 돼
‘미주한인의 날’‘찰스 H.김 초등교’등 앞장
“1.5세, 2세들 한인커뮤니티에 애정 많아
그들과 함께 봉사하는게 요즘 삶의 보람”
민병수 변호사는 초대 LA 총영사를 지낸 민희식 총영사의 아들로도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 한국 대사관이 생기기도 전인 1948년 LA 총영사관이 처음 설치되면서 첫 총영사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미국에 건너온 게 경기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는 미국생활이 60여년이 되는 1.5세 초기 이민자인 셈이다.
그 당시 LA에는 이민자와 자녀를 합쳐 한인 인구가 1,000명이 안됐다. 지금과 같은 대량 이민 행렬도 없고 서로 결혼할 대상도 많지 않아 커뮤니티가 성장할 수 없었다. 또 차별과 경제적 고통도 이겨나가야 했다.
민 변호사는 “활동영역도 제한됐고, 개인 사업을 하는 경우도 많지 않았지만 진짜 나라를 빼앗겨 봤던 사람들인 만큼 애국심만은 대단했다”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개인적으로는 미국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자유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천국에 온 것 같았지만 ESL이란 개념이 없던 상황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교실 수업을 이해하지 못해 지진아 취급을 받으며 외톨이란 느낌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민 변호사는 그때의 오기가 형법 변호사란 꿈을 키우게 된 동기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1960년 포모나의 기독 사립대학인 라번 유니버시티를 졸업했지만, 당시 차별적 정서로는 아시안 학생의 법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했다. 웨스트코비나 통합교육구에서 15년간 교사로 일하며 꿈을 접지 않았던 그는 1975년 마침내 주경야독으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 당시는 백학준씨가 판사로 임명되고, 이후 판사가 된 장병조씨가 LA에서 개업하고 있던 상황으로 민 변호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3번째 한인 변호사가 된 순간이었다.
변호사가 된 뒤 92년 LA 폭동은 민 변호사에게 한인사회의 권익보호에 더욱 크게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고 한다.
폭동 이후 11명의 변호사들과 함께 한인법률권익재단(KALAF)을 만들고 사재와 시간을 털어 리커 업주들을 대변해 LA시를 상대로 불합리한 조건부영업제한(CUP) 조치에 대한 소송을 진행했었다. 2년이 걸린 소송에서 대부분의 원고는 다 빠져나갔지만 결국 남아있던 3명의 원고는 승리를 하고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고객의 80%가 한인이었다”는 그는 어려운 한인들을 위해 “적당히 내가 굶지 않을 선에서 수수료를 받지 않기도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요즘 그는 변호사란 본업보다는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 일에 더 큰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이민 100주년 ‘코리안-아메리칸 데이’ 위원장을 지내며 LA시와 가주에서 ‘미주 한인의 날’을 제정하는데 앞장서기도 한 그는 특히 1.5세, 2세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민 변호사는 “젊은 세대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면서 “이들이 원하는 한 계속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민 변호사가 요즘 바짝 커뮤니티 일에 매달리는 것은 그 자신이 해방 후 이민사의 한 밀알이기 때문이다. 사실 민 변호사의 한인 청소년 및 2세들을 위한 활동은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됐었다.
1960년대 2세들로 구성된 당시의 한인회(AKCO)를 시작으로, 1970년대 한인타운 청소년회관(KYCC)에도 관여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인 단체와 함께 해왔다.
당시에도 자신이 올드타이머 1.5세로서 이민 1세들과 일하면서 ‘들판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난 2003년 이민 100주년 기념사업이 끝나고 커뮤니티에 봉사정신과 애정을 가진 1.5세, 2세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의 지표도 더욱 발전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찰스 H. 김 초등학교’명명 작업을 추진하면서 이들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민 변호사 자신이었지만, 17개 타인종 커뮤니티 및 단체들을 제치고 이 이름이 선정되도록 치밀한 준비와 전략을 준비한 사람들은 1.5세, 2세였다는 것이다.
민 변호사는 “1.5세, 2세들은 순수하면서도 유능하고 특히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이 많다”면서 “이를 1세가 인정하고 도와주면 큰일을 할 수 있고, 이들과 일하는 것이 요즘 내가 사는 기쁨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1년에 수백명씩 쏟아져 나오는 후배 변호사들에 대해“인구에 비례해 1.5세와 1세가 이렇게 많이 진출한 것은 한인 커뮤니티밖에 없다”면서“변호사가 많아지면 문제가 있을 때 법적으로 이를 대변할 인력이 많다는 뜻”이라며 긍정적인 시각도 보였다.
■민병수 변호사는
1933 한국 서울 출생
1948 15세때 도미
1960 라번대학 졸업, 교사로 15년 근무
1975 캘리포니아주 변호사시험 합격
1976~1985 한인타운청소년회관(KYCC)이사
1980~1989 LA카운티 사법자문그룹 자문위원
1985 커뮤니티공로상(LA센트럴라이온스클럽)
1983~현재 ‘법의 날’ 행사 주관
1990 키와니스 클럽 커뮤니티 공헌상
1996, 2005 한미변호사협회 공로상
1997 인권공로상(멜빈 존스 펠로우)
1997~현재 한미연합회(KAC) 이사장 및 이사
2000~현재 한인장학재단 이사
2000, 2005 한국 대통령 공로상
2004 미주한인의날 제정 추진위원장
2006 남가주 미주한인재단 회장
<배형직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