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린걸 보니, 국수가 먹고 싶어진다. 서울에서 자주 들렀던 국수집 생각도 난다. 삼각지역을 지나 화방들이 늘어선 길가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돼지고기를 파는 허름한 집들 옆에 내가 즐겨 찾던 국수집이 있었다. 오래된 유리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서 오세요~”하는 낮은 할머니 목소리가 반기는 그 국수집에는, 낮은 탁자 대여섯 개,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들이 열개 남짓 있고, 뒷벽 나무선반 위 소형 TV에서는 드라마가 나오곤 했다. 저녁 무렵 그 국수집에선 주인 할머니가 “쯧쯧” “어이구 세상에…”라며 드라마를 실제 이야기 보듯 애타하셨다.
이 국수집은 허름하고, 초라하고, 평범하지만,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선, 이 집에는 돈을 받는 사람이 없다. 열명이 먹건, 단 한명이 먹건 간에, 손님이 알아서 돈을 내고, 파란색 플래스틱통에 있는 잔돈을 헤아려 거스름돈을 가져간다. 장사하면서 돈 받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여러 명이 우르르 먹고 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누가 돈을 내는지, 슬쩍 그냥 나가는 건 아닌지’ 쳐다보게 된다. 그러나, 주인 할머니는 국수 삶고 김밥 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안녕히 가세요” 라는 말은 빠뜨리지 않으면서 계산하는 쪽으로는 눈도 치켜뜨지 않는다.
또, 이 집은 어떤 다른 식당보다 국수 인심이 좋다. 먹던 국수를 다 끝내기도 전에 “더 드릴까?” “모자라면 말해요” 라는 인정 넘치는 물음이 빠지질 않는다. “여기 국수 좀 더 주세요~”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국수 한 대접이 금방 덤으로 온다. 2,000원짜리 국수 인심이 이 정도니, 한 그릇 팔면 얼마가 남길래 이렇게 덤을 많이 주나… 하는 생각도 든다. 원래 양이 푸짐하여 난 별로 덤을 얻어먹지 않았지만, “더 드릴까? 모자라면 말해요”라는 할머니 목소리가 매번 듣기 좋았다.
이 두 가지 말고도 이 국수집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고, 그 일화는 이미 몇 군데 잡지에 게재된 바 있다. 예전 어느 날, 이 국수집에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가 한 명 들어왔다고 한다. 국수 한 그릇을 시킨 이 사람은, 할머니가 국수를 내오자마자 허겁지겁 마시다시피 한 그릇을 다 먹어버리고는 값을 치를 돈이 부족했는지… 할머니가 잠시 돌아선 사이 냅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할머니가 따라 나가보니, 그 남자는 영락없이 내달아 뛰고 있었다. 그때 그 주인 할머니는 달아나는 남자에게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그냥 가. 뛰지 말어, 다쳐요”’
요즘처럼 퓨전이다 뭐다 비싸고 좋은 음식이 많은 세상에, 멸치국물이 진하게 우러난 국수에 속이 꽉 찬 김밥이 전부인 국수집. 난 그 국수집에서 할머니가 끓여주시는 국수만 먹은 게 아니라 그 푸근한 얼굴을 매번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외식모임도 많고, 친구나 선후배들 만날 일도 많은 연말, 국수집 할머니 같은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좋은 식당들이 여기 LA에서도 종종 눈에 띄었으면 한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듯이.
<오민경> 나라은행 광고·홍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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