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흔히 저녁놀에 비유한다. 거기에는 인생의 종장을 의미하는 철학이 숨어 있다. 밀레의 ‘만종’이 감동을 주는 것도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이라는 시간적 소재와 기도의 소망이 감사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의 명작 ‘노인과 바다’는 불굴의 투지와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인간 정신을 산티아고라는 노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는 비록 늙었지만 내일을 위해 사자의 꿈을 꾼다.
노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다. 약해 보이지만 강한 것도 노인이다. 그 누가 노인의 옹고집을 꺾을 수 있겠는가. 그 누가 노인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단 말인가.
피천득씨는 그의 수필에서 인생은 40부터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고희를 넘긴 70부터란 말도 나온다. 물론 노인을 위로하는 뜻도 있지만 노년을 긍정해 주는 말이다. 양로원 나이로 70은 청춘이다. 노인을 과잉보호해서는 안 된다. 노후대책에 대한 고정관념도 많이 변화되고 있다. 자식의 그늘 밑에서 전전하며 손자손녀들이나 봐주는 그런 안이한 시대가 아니다.
노인을 보는 부정적 시각은 단순하다. 말 많고 잔소리 하는 노인, 융통성 없고 고집불통인 노인, 곧잘 화내고 불평 많은 노인, 병고에 시달려 불쌍하고 의지할 곳 없는 노인, 어떻게 보면 노인은 현실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따라서 자신의 우산을 끝내 접지 않고 홀로서기를 하는 노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어린 시절 이런 수수께끼를 한 적이 있다.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걷고 나중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노인은 지팡이가 필요하다. 그 지팡이는 사람이나 경제력을 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편안과 안락함이다. 근원적인 마음의 평화가 아니다. 노인을 노인답게 지탱해 주는 가장 확실한 지팡이는 없을까. 그것은 역시 내면적인 심경의 변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순수하기로는 어린이를 따를 수 없고 왕성한 힘은 청춘을 따를 수 없다. 능수능란한 솜씨는 장년을 당해낼 수 없다.
특히 노년은 그런 인생을 살았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감사는 너그럽고 자족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감사하는 순간 불평불만은 사라지고 스스로 행복해진다. 감사는 주는 것이지만 실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하나님이 최초 인간에게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는 애피타이저의 유혹이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라는 그 감사의 과실은 디저트의 향연이다. 먹고 안 먹고는 순전히 자신의 뜻에 달렸다. 곱게 늙어간다는 것도 선택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복만큼이나 큰 축복이다. 늙어갈수록 ‘감사합니다’라는 이 평범한 독백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절실한 것인지 노인은 외롭지 않다.
고영주 국어학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