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암살되는 엄청난 사건을 겪었다. 그 충격 가운데에도 연말은 어김없이 다가왔고 한 해가 결국은 이렇게 지는가 하는 일말의 안도감마저 도는 분위기였다.
12월 치고 그다지 춥지 않은 탓이었던가. 정국은 여전히 어수선했지만 뭔가 해방감을 거리거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 지긋지긋한 유신체제로부터 벗어났다는.
그날, 그러니까 1979년 12월12일. 한남동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그러나 그 모든 기대감을 얼어붙게 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세력이 쿠데타를 결행,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러 가는 와중에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2.12 사태다.
‘용산이 불바다가 됐다’는 말만 번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민간인들은 알 길이 없었다. 한강다리가 막혔다. 다리 한가운데에 퇴근길 통근 객들을 버스에 묶어둔 채 쿠데타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군이 대치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총알받이가 될 판이었다. 계속 유동적이었다. 그러다가 다음 날인 1979년 12월13일 새벽 5시께 상황은 종료됐다. 대통령이 신군부가 내민 참모총장 체포 재가서에 마침내 서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 차례의 유혈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사태다. 이 두 차례의 쿠데타를 통해 신군부가 집권했다. 제5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했던가. 그렇지만 여전히 ‘… 했더라면’이라는 조건적 단서를 달고 싶은 것이 그 당시의 상황이다. ‘대통령이 더 완강히 버텼으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당시 그 대통령은 함구로 일관했다. 12.12사태, 광주사태를 직접 겼었다. 군부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나 대한민국 사상 최단 집권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기면서도. 그리고 재야 묻혀 칩거하면서도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혹심한 억압이 따랐다. ‘민주화 세력’이란 사람들에 대한 신군부의 억압이다. 그 반대급부로 그들은 정치에 있어 ‘도덕적 고지’를 점령케 됐다. YS, DJ로 상징되는 사람들이다.
결국 그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 문민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뒤따른 것이 신군부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단죄다.
또 다시 혼돈의 세월이다. 뭐가 뭔지 모르게 된 것이다. DJ, YS로 상징되던 민주화 신화는 빛을 바랜지 이미 오래다. 민주화 허무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핵공포가 짓누르고 있다.
이 상황에서 당시의 대통령, 최규하 대통령이 결국 타계했다. 향년 88세.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국민장으로 엄수되는 장례일이 10월26일로 잡혔다.
왜 하필 그날일까. 그 날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날 아닌가. 문득 역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 때 좀 더 버텼더라면…’이라는 아쉬움도 여전히 가시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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