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조금 지나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드니 여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빨리 TV 틀어봐. 뉴욕의 세계무역센타 빌딩이 없어졌어”
평소 우스개 소리를 잘 하는 동생인지라 아침부터 무슨 농담을 하고 있나 생각하며 TV를 켜보았다. 여객기 2대가 일정한 시차를 두고 쌍둥이 빌딩에 돌진해서 시뻘건 불꽃과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잠시 후 100층이 넘는 높다란 건물이 모래섬처럼 차례로 주저앉는 광경이 연속해서 방영되고 있었다.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얼마동안 망연자실 바라보다가 문득 뉴욕에 살고 있는 막내딸이 생각났다. 이 시간이면 틀림없이 맨해턴 중심지에 위치한 직장에 출근 해 있을 것이 아닌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으나 연락은 불통이었다. 오후 4시경이 돼서야 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무사히 있으며 직장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2,792명의 무고한 목숨, 그중 한인만 해도 20여명을 앗아간 911 테러도 벌써 5년이 흘렀다. 미국은 이를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어서 이라크를 침공하여 집권층을 몰아내는 등 표면적으로는 승리를 거둔 것 같지만 아직도 총성과 테러는 사라지지 않고 이 시간에도 계속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전 세계에서 7만3천명 가량이 죽었고 그중 4만4천여 명이 이라크의 민간인이라고 한다. 미군 전사자의 숫자도 2,700명 선에 이르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은혜 가운데 하나인 시간이라는 망각 속에 세계무역센터가 서있었던 그라운드 제로에는 프리덤 타워를 건설하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뉴욕을 찾는 관광객도, 동시다발 테러로 이용됐던 비행기도 탑승객으로 여전히 붐비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겪었던 1950년 9월은 반세기가 넘은 지금에 와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6.25전쟁 시 우리 가족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대부분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서울에서 지냈는데 북한 정권하에 있었던 3개월, 특히 9월 한 달은 도저히 인간의 생활이랄 수 없는 아비규환과 같은 세월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공습과 포격으로 인한 시신들 그리고 하루 한 끼도 채우지 못하는 굶주림은 전쟁 중이라 그렇다 쳐도 그런 혼란을 이용하여 그 동안 쌓인 원한과 감정을 해소하려는 만행이 공공연히 저질러졌다. 해방 전후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양식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훗날 공산주의 체제와 실상을 목격하고 대부분 사상전환을 하였는데 문제는 선머슴이 사람 잡는다고 공산치하에서 갑자기 쥐꼬리만 한 권세를 쥐게 된 자들로서 못 된 짓은 모두가 그들의 소행이었다.
그런 앞잡이 때문에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의 죄 없는 양민들이 희생과 고통을 당하였다. 그들 자신도 수복 후 결국 처형당하고 그 형제와 자식들도 평생 부역자 가족이라는 눈총을 받으며 불행한 삶을 보내고 있다.
똑같이 생기고 좋게 보이지만 유사시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표변하는 무서운 인간들이 있었다. 비뚤어진 인격과 열등감을 가졌거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 평소 소외되어있던 불평불만 분자들인데 전쟁보다도 오히려 그런 인간이 더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잘못 만나면 그 사회나 단체가 잘못 되어지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그 구성원들이 피해를 입게 되어있다. 오늘의 북한을 보자. 김정일과 그 추종 세력을 제외하고는 지난 56년 동안 1950년 겪었던 여름의 생지옥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니 미주에 있는 한인사회는 어떠한가. 그 장래를 위해서는 매사를 그냥 넘길 일만은 아닌 것이다.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