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가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갈비.
우리 문헌에 갈비(乫非)라는 음식명은 1604년 중국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 소선상(小膳床)에 처음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한문 표기는 갈비(乫非)라고 적고 한글로는 가리구이 가리탕 등 가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 같다. 그러나 자세한 조리법은 1800년대 말 저자 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에 갈비(乫飛)라는 이름
으로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리를 한 치 길이씩 잘라 삶되 양을 튀한 것과 부아, 곱창, 통무, 다시마를 함께 넣고 무르게
삶아 건진다. 가리찜할 때의 무는 탕 무처럼 썰되 더 잘게 썬다. 다른 고기도 그와 같이 썰고 다시마는 골패쪽처럼 썰고 표고, 석이버섯도 썰어 놓는다. 파, 미나리는 살짝 데쳐 놓는다. 이상의 모든 재료를 갖은 양념에 가리를 섞어 주물러 볶아서 국물을 조금 있게 하여 그릇에 담고
위에 달걀을 부쳐 석이와 같이 채쳐 얹는다라고 되어 있다.
조풍연 선생에 의하면 예전에는 갈비를 짝(소갈비 양쪽 중 한쪽)으로 팔아 가정에서 명절이나 잔치 때 한 짝을 사다가 잔치 음식으로 조리해 먹었지 그 외에는 가리음식을 먹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1939년경 서울 낙원동 평양냉면집 주인이 전라남도(지금의 광주광역시) 송정리에 갔다가 그곳의 술집에서 가리구이를 대로 구워파는 것을 보고 서울에 올라와 손님들에게 냉면과 함께 가리구이를 구워 팔기 시작했다. 당시는 냉면 한 그릇에 20전, 특제가 30전이었고 갈비 한대
가 20전이었다. 냉면 보통 한 그릇과 갈비 두대를 시켜 먹으면 60전으로 종로의 극장이나 요리집, 카페, 바 등에서 파하고 술도 깰 겸 출출한 속을 채우는 야참으로 이만한 것이 없어 그 인기가 대단했다. 이때부터 냉면집에서 갈비나 고기를 굽기 시작해 대중화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야끼니꾸도 오사카의 쇼쿠도엔[식도원(食道園)]의 전신인 평양냉면집에서 유래되었다.
오사카에서 평양 냉면집을 경영하던 평양 출신의 임광수라는 식도원 창업자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한국에 들어와 냉면집에서 불고기를 굽는 것을 보고 일본 오사카에 돌아가 불고기를 굽기 시작한 것이 일본 야끼니꾸의 시초가 된 것이다. 미국의 LA갈비 역시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소고기 수입을 시작으로 80년대 중반 미국의 LA지역에 사는 교포들 사이에서 이미 LA갈비가 유통되고 있었다. 미국에 유학갔던 사람이 사업 실패 후 육류 중간 유통업자로 변신, LA지역 내 한국식당에 육류를 납품하면서 상품화하게 되었고다. 일반적으로 미국 교포사회에서는 저녁 시간에는 우리나라 갈비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갈비 모양의 고기형태로 갈비를 팔고, 점심시간에는 LA갈비형태로 잘라 2~3조각을 밥에 얹어 점심메뉴로 판매하였다.
점심용 메뉴의 저렴한 가격을 맞추기 위해 불갈비로의 가공비용과 시간 절약을 위해 LA갈비 형태의 갈비가 개발되었다. 이는 LA를 여행한 한국 여행자들을 통해서 한국에 소개되고 상품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에 따라 1990년에 수입하기 시작 했다. 지금은 수입육의 49%가 갈비부위이며, 미국에서 도축되는 LA갈비 3분의2가 한국에 수입되고 있다.
예전에 궁중이나 사대부집에서는 갈비구이보다는 주로 갈비찜이었고, 갈비구이는 1930년대 주막의 술안주로 서민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쇠갈비는 수원갈비와 예산갈비가 유명했고 이동갈비와 왕갈비로 불려지는 안의찜갈비가 있다. 불갈비의 경우 뼈의 길이가 2인치인 것은 이동갈비 또는 불갈비라 불리고, 4인치인 경우는 수원갈비로 불려진다. 수원 갈비는 수원 팔달문 안에 [화춘옥]이 원조집이며, 지금은 [명성옥] [삼부자갈비집]등 수원 갈비의 명성을 이어가는 갈비집들이 많이 생겼다. 예산의 [소복갈비집]도 성업중에 있고, 안의 대중식당은 2대에 걸쳐 그 명맥을 유지하면서 거창의 [별미식당] [대전식당]과 함께 왕갈비찜으로 알려져 있는 별미집들이다. 특히 안의에는 [孝子白丁趙貴千之閭]라고
쓴 조선시대 신분사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백정비석이 왕명에 의해 그 내력과 함께 세워진 곳으로 수십년전에는 전국의 백정들이 이곳에 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백정비석과 안의 왕갈비
함양군 안의면 소재지에 쇠부리 마을이 있다. 황석산을 따라 내린 진수산(대밭산)은 제월대 밑에 마치 배추속을 버무려 놓은 듯한 ‘김치바위’에서 마감되고 대밭산 자락에 형성된 ‘쇠부리마을’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관북마을의 백정 비석과 함께
마치 안의 왕갈비의 내력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옛날 아느이현에서 과거 길을 가려면 향교앞을 지나 비단을 펼쳐 놓은 내라 하여 붙여진 금호강(錦湖江)을 건너 교북리 관북마을(역말)을 지나야 한다.
이 관북마을에 글 공부를 하는 조귀천(趙貴千)이라는 젊은이가 노부(老父)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이 늙은 아버지는 눈먼 소경이었다. 효성이 지극한 조 효자(趙 孝子)는 앞을 못보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해 봉양(奉養)했으나 아버지의 병이 차도(差度)가 없게
되자 정한수를 떠 놓고 매일 같이 지성으로 천지신명께 빌었다. 백일이 되는 날 꿈속에 하얀 백발을 한 도사가 나타나 이르기를 천일(千日)도안 소(牛)의 간(肝) 일천봉을 매일 같이 구하여 아버지에게 봉양을 하면 눈을 뜨리라고 하였다.
조 효자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글 공부하던 책을 덮고 당신 천민(賤民)으로 취급되던 백정(白丁)을 자청하여 안의현의 토수막(안의 사람들은 도축장을 이렇게 부르고 있음)에 고용살이로 들어갔다. 이후 매일 한봉씩 3년간 구백구십구봉을 봉양하였으나 아버지의 병은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 천일이 되는 날, 쇠간 한봉을 구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금호강이 범람하여 강 건너 집에 돌아 갈수 없게 되었다. 조 효자는 강가에 털썩 주저앉아 아버지가 계시는 맞은 편 집을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효심이 부족하여 폭우가 내린 듯 자책하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 효자의 효심에 천지신명이 감동하였던지 갑자기 강물이 상하로 갈라지며 길이 열려 조 효자는 단숨에 집에 달려가 눈먼 아버지에게 쇠간을 봉양하니 아버지의 감겼던 눈이 뜨이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신분의 귀천(貴賤)에 관계없이 조 효자가 사는 집 앞 관북 금호강가에 효자비를 세우라는 왕명(王命)으로 ‘효자백정조귀천지려(孝子白丁趙貴千之閭)’라는 전국 유일의 백정비(白丁碑) 즉 효자비(孝子碑)를 세워 효행의 본보기로 삼도록 하였다. 이 비는 지금도 관북들 금호강가에 돌보는 이 없이 외롭게 서 있다.
옛날에는 소를 잡으면 쇠의 간이나 내장 등 부속물은 토수막에서 수고한 백정들에게 삯전으로 주었다. 물론 전해 내려오며 부풀려 진 부분도 있겠지만 이러한 전설과 같은 실화(實話)는 ‘안의에 오면 안의 왕갈비를 먹어야 한다’는 장맛이 맛깔스럽게 베여 있는 안의 왕갈비 맛과 함께 함양군의 문화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역에서는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안타깝다. 안의 왕갈비는 크기가 주먹만하여 우선 보기만해도 포만감을 느낄 정도다. 정월 장(醬)과 엿기름으로 고은 물엿 등 갖은 양념으로 우선 갈비에 연하게 간한다. 뭉근 불에 오래 동안 끓이다, 표고버섯, 양파, 당근, 파등 야채를 넣어 고명으로 색깔을 맞춘 안의왕갈비는 모양새나 맛깔스러움이 식욕을 더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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