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어느 한 여름날, 모처럼 큰 대자로 한 숨 잘 자고 일어나는 날 보고 아내는 깔깔 웃으며 말한다. ‘여보, 망가져도 그렇게 망가질 수가 있어요?’ 옛날 그 준수하던 청년은 어디 가고 중년의 망가진 인형 같은 내 모습이 우습고 측은하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악의 없는 아내를 탓할 수도 없고 게면쩍게 따라 웃다가 문득 망가지는 게 어때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가진다는 건 가식이 없다는 뜻 아닌가? 있는 그대로 솔직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좋은 말이다. 젊어서는 품위와 체면을 지키느라 속마음을 가리고 얼굴에 가면을 쓰고 살았지만, 이젠 내 모습 그대로 보일 만큼 마음의 여유도, 자신감도 생겼다는 증거 아닌가?
내가 망가지면 남들이 편하다. 아프고 부족한 속내를 드러내는 나로 인해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대화한다. 힘들 때 푼수 친구들이 더 보고싶은 것도 그 때문일 게다. 그럼에도 우리가 망가지는 걸 꺼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자존심 때문이리라. 섣불리 마음을 열었다가 우습게 보이면 망하는 것 아닌가하는 기우도 있다.
그러나 망가지는 것과 망(亡)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망가짐은 성숙한 삶의 한 표현방식이고 한 단계 높은 대화술이라 느껴진다. 망가지다는 순 우리말이지만 한자로 뜻풀이를 해본다면 아마도 ‘망가(忘假)’가 제격인 듯 싶다. 가식(假飾)을 버린다는 뜻. 내 본연의 모습이 아닌 가짜를 버린다는 의미다. 헛것이 추한 나를 가려주는 이점이 있으니 완전히 끊어버리기가 힘들다. 그러나 진실이 아닌 것은 비슷한 것도 가짜임이 이젠 조금씩 보인다.
망가짐에 좀 더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자로 뜻말을 만들어본다. 바랄 망(望)자가 보인다. 가장으로서 나의 망가짐을 바랄 망(望)자의 프리즘을 통해 들여다보니 그 속에 내 인생의 소원과 지혜가 보인다. ‘망가’짐의 색다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우선’망가(望家)’라고 적어본다. 미국 땅에서 행복한 일가(一家)를 이루려는 내 첫 소망. 그 꿈을 안고 30여 년을 살아왔다. 아내는 처녀 때 내가 슈퍼맨인 줄 알고 결혼했다고 한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실망이 커졌다.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옛날 크로마뇽인처럼 동굴 속에 들어가 혼자 끙끙대며 머리를 짜내었다. 아내는 부부간의 대화로 풀려고 열심히 나를 설득했다. 우리가 서로 다른 혹성에서 온 줄을 모르고 결혼했다.
세월이 갈수록 나는 말수가 적어졌다. 옛 원시인들이 사냥을 할 때 침묵을 지켰던 것처럼 나는 밥벌이를 하면서 말수가 적어졌다. 아내는 반대로 말이 많아졌다. 맹수들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해 큰 소리로 떠들며 밥을 짓던 원주민 여인들처럼 아내는 수다가 되었다.
그렇게 다른 남녀가 만나 살아왔는데 세월 지나면서 한 집안을 이루었다. 여전히 아내는 내가 슈퍼맨이 아니고 크로마뇽인 게 못마땅하지만 한 동굴 속에서 오손도손 살아간다.
‘망가(望可)’도 좋은 말이다. 새로운 가능성(可能性)을 바라본다는 뜻이 된다. 중년을 지나며 부나 명예의 축적보다는 나름대로 바르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 공감이 난다. 돈과 명예를 거머쥘 재주가 없는 것이 내 진짜모습인 것이 이제 확연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망가(望架)’라고도 적어본다. 십자가(十字架)를 바라본다는 뜻이다. 나이 들면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하고픈 바람이 담겨져 있다. 사실 망가짐이란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이란 생각이 든다. 허세 부리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망가짐은 남을 배려하는 겸손이 있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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