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LA에 26년째 살고 있다. 그리고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회상하여 보면 기쁘고 좋은 일 보다는 슬프고 힘든 시간이 훨씬 많았다. 물론 나만이 아니고 많은 한인들도 책으로 쓸만큼 사연들이 있을 줄 믿는다. 처음 이민 와서 좋은 미국회사 다녀서 몇 년간 모은 돈으로 희망을 가지고 식당을 시작 하였으나 실패. 그 후로 페인트 헬퍼를 시작으로 건축 일을 지금까지 하여왔다.
몸이 아파서 놀고, 일거리가 없어서 놀고 아무튼 5년 이상을 하늘을 벗 삼고 살았다. 아내 눈치 보여 집에서 나와 갈 곳도 없으니 길가 나무 그늘에 차를 받쳐놓고 신문을 외우다 시피 보다가 저녁이 되면 그래도 가장인지라 씩씩하게 웃으며 허풍을 떨고 들어 올 때가 여러 번 있었다.
일거리를 찾아 알래스카, 뉴욕, 그밖에 다른 주에 까지도 가보았다. 그러나 사는 것은 맨 날 그 타령이었다. 그래도 내 운이 좋은 것은 아내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잘 감당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민 올 때 가방 몇 개 들고 맨손으로 왔다고 위로 하였다. 어떤 때는 크레딧 카드 다 쓰고 밸런스 없는 체크 북을 방바닥에 던지고 “어떻게 살아가면 좋으냐고” 훌쩍훌쩍 울던 때도 있었다.
지금 와 곰곰이 그 때를 생각해 보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다 살아갈 방법이 있었다.
10여년 전 허리 척추에 이상이 있어 1년 이상을 일도 못하고 쉬었다. 작년에는 대퇴관절 이식수술을 받고 집에서 쉬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몸이 아파 고생하였든 어려움 이 두 가지를 합한 것보다 더 어려웠든 것은 자식이 공부 안하고 거리를 헤매고 다닐 때였다. 나는 무엇을 내가 잘못하고 있는지, 왜 이러한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포기하는 것이었다. 나의 무거운 짐과 염려를 전능자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속된 말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생각을 바꾸니 그렇게 마음이 평안할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하던 아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제는 2년째 학점 4.0을 지속하고 있다. 아팠던 몸도 좋아져 튼튼하게 회복이 되었다. 지난주에는 내가 집을 고쳐주었던 사람에게 카페 식당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자본이 조금 모자란다 하니 즉석에서 3만 달러 체크를 끊어 주었다. 무이자로 1년 후에 갚으라고 하였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다 있다. 그분은 나의 집 주소, 전화번호도 모르고 오직 나의 셀룰라 번호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삭막하고 서로 믿지 못하는 LA에서 나를 믿어준 그 사람 때문에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큰 기침 한번 하였다. 그리고 노후를 걱정 안 해도 살 수 있도록 형편이 좋아졌다.
현재 앞이 안 보이고 절망 중에 탄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생을 길게 보고 쉽게 좌절 하거나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다.
김지향/ 풀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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