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옥<자영업>
그러니까 그때를 잊지 못한 것이 유독 나만은 아니었어.
한국에서 살고있는 나의 여동생은 딸만 둘을 두었다. 2년 터울로 나란히 자라는 아이들이 봄날 돋아나는 튜울립처럼 예쁘게 자랐다. 미국에 사는 이모네 집을 세 번 방문하고 나더니 아이들 마음에 유학바람이 불었다. 용기있고 결단력이 있는 작은아이가 먼저 행동으로 옮겼다.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에 드디어 유학길에 올랐다.
내 아이들이 다 커서 나간 텅 빈집에 중3짜리 어린 조카가 한 식구가 되었다. 한국에서 갓 왔으니 하나에서 열까지 내 도움이 필요하니 갑자기 내가 바빠졌다. 그렇지만 붙임성이 있고 어른들을 대하는 예의가 있어서 말벗도 되어 주고 설거지도 돕고 찬거리도 다듬으며 다분다분 이야기를 나누니 새로운 재미가 소록소록 피어났다.
미국생활에 알아야 할 예의와 생활의 기본을 가르치고 운전을 가르치며 믿음생활까지 이끌어 겨우 혼자서기를 마쳐갈 즈음에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마친 큰조카도 왔다. 동생의 딸 둘이 다 온 것이다. 물론, 조카와 이모사이지만 문화적인 차이로 인하여 신경에 거슬리는 일들도 많았고 저들은 모르고 나만 혼자 힘들고 괴로운 일들도 많았다. 내 조카들이기에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것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렇게 4년을 살았다.
둘이서 자라 얼바인으로 이사를 나갔다. 의젖한 대학생들이 되어 아름다운 제 앞날을 위하여 열심히들 살아간다. 그런데 남은 나에겐 아이들이 나간 자리가 너무나 크다. 엄마 아빠를 떠나 이모인 나에게 모든 것을 맡긴 아이들과 참으로 많은 것을 함께 한 탓인가 보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아이들의 어려움에 대하여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인생과 종교, 결혼, 그리고 지나간 한국생활을 회상할 때면 떡볶이의 입맛까지 딱 일치하는 우리 셋의 동일한 그리움이 우리를 더욱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 같다.
일을 해 가며 하는 공부에 시간이 남을 턱이 없음을 아는데도 가끔 아이들이 왔다 갔으면 하고 혼자 욕심을 내곤 했었는데, 봄방학이 되면 집에 오겠다는 반가운 소식을 받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리빙룸에 누워 셋이서 오만가지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때를 잊지 못했던 것이 유독 나만이 아니었었던가 보다. 조카의 목소리도 들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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