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순간적인 판단은 놀랄 정도로 정확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멋지게 생겼는지, 태도가 어떤지, 어떤 장소가 맘에 드는지 아닌지 등은 그다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판단할 수 있다. 알람시계나 셀폰 진열대에서 제품을 고르는 것도 머리를 쥐어짤 일이 아니다. 자신의 필요와 제품들의 특성 등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머리를 돌리면 금방 해답이 나온다. 하지만 조금 복잡한 이슈들이 있다. 집이나 아파트를 고를 때, 또는 최상의 휴가를 위해 계획을 짤 때는 최선의 방안을 쉽게 찾기 어렵다. 한참을 고민해도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당분간 이 이슈를 제쳐두는 경우가 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해 뒤로 미룬 것이지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태도가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지적한다. 뉴욕타임스가 최근 이를 소개했다.
네덜란드 연구팀 ‘사이언스’지에 게재
무의식의 영역에서 대신 계속 탐구 중
너무 의식적으로 고민해봐야 자충수 일쑤
자동차, 집 등 고를 땐 쉬면서 하는 게 효과적
우산, 알람시계 등 간단한 물건은 빠른 결정이 바람직
학술지 ‘사이언스’ 최근호에 게재된 네덜란드 심리학자들의 논문에 따르면 복잡한 이슈들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를 일단 잊어버리고 일정기간 지내는 게 항상 마음에 두고 고민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난해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sleep on it’이라는 말처럼 시간적 여유를 갖는 게 현명하다는 연구결과다. 이슈를 잊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무의식의 세계는 이 이슈를 끊임없이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는 꿈이나 무의식적인 발언 등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버지니아대학의 심리학 교수이며 ‘Strangers to Ourselves: Discovering the Adaptive Unconscious’의 저자인 티모시 윌슨은 무의식의 세계를 천착해 온 전문가다. 그는 네덜란드 심리학자들의 무의식에 대한 연구 결과에 대해 무척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모든 획기적인 연구가 그러하듯이 이 연구 결과도 여러 가지 반론과 철저한 검증 요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어마어마한 정보를 입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강의실에서 딴 생각을 하고 있다가도 자신의 이름이 거명되면 다른 강의 내용까지도 무의식의 세계로 입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발표된 새 연구는 여기서 한 술 더 뜬다. 무의식적으로 입력된 정보들이라도 머리에서 조합되고 분류되며 다른 관련 정보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판단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이렇게 진행됐다. 자동차 4대를 각기 특성을 기록해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제작 연도, 연비, 트랜스미션의 성능, 핸들링 등 4가지 부품에 대한 특성이 기록됐다. 80명의 학생들은 이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를 고르게 돼 있다. 일부 학생들에게는 차량 고르기에 4분을 주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철자 바꾸기 문제를 풀도록 했다. 두 그룹으로 나누어 전혀 다른 일을 하도록 한 것이다.
이 때 4가지 부품만을 기준으로 차량을 고르는 데 있어서는 열심히 고민하고 분석한 학생들이 철자 바꾸기 문제를 풀면서 딴 짓한 학생들보다 좋은 차량을 고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부품이 12가지로 많아지자, 부품만 뚫어지게 쳐다본 학생들보다는 철자 바꾸기를 하면서 차량을 고른 학생들이 더 좋은 성적을 보였다.
이는 우리 두뇌의 무의식의 영역이 의식의 영역보다 많은 정보를 수용할 용량을 갖고 있으며 나아가 편견의 지배를 받지 않아 객관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돕는다고 네덜란드 심리학자들은 설명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 애프 딕스테루이스 교수는 “집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집을 구입할 때 출퇴근 교통사정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집을 구입한 뒤 출퇴근에 하루 2시간 이상 기차에 몸을 싣고 나서야 그 고충을 실감한다.” 의식적인 사고의 한계를 말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세계는 출퇴근의 문제점까지 입력해 종합적인 판단을 하도록 돕는다고 딕스테루이스 교수는 설명했다.
연구팀은 40개 품목이나 자산항목에 대해 소위 ‘복합적 점수’라는 것을 만들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학생들이 이들 품목이나 자산항목에 대해 매긴 점수를 집계해 보면, 자동차, 컴퓨터, 아파트 등이 상위에 올랐다. 그리고 드레스나 셔츠는 중간 점수를, 우산이나 부엌의 오븐 장갑은 바닥권이었다.
연구팀은 이 점수를 토대로 삼아 최근 이들 품목을 구입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음 단계의 실험에 들어갔다. 그 결과, 점수가 하위권인 단순한 물건을 구입할 때 의식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점수가 높은 품목의 경우, 다시 말해 신중하게 구입해야 할 품목의 경우, 의식적인 고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만족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 연구에 나타난 이론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도식적으로 나누어 조사를 했는데, 사실 감정과 기억이 무의식의 영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조사가 수반되지 않았다. 그런데 품목에 대한 이러한 감정과 기억이 무의식의 세계를 떠돌다 최종 결정에 알게 모르게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조나단 스쿨러 교수는 “이 이론대로라면 기업가들이 중요한 보고서를 읽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의식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일단 이 이슈를 제쳐두어야 더 효과적이란 말인데 실제 그럴 수 있을까?”하고 의아해 했다. 아직도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할 후속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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