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회생활 초년생부터 6년간이나 보스로 모셨던 선배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멀리 타향에 있는 관계로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그저 전화로 심심한 위로를 전했을 뿐이었다.
평소에 결혼식에는 잘 참석하지 않아도 장례식에는 꼭 참석하는 편인데, 그것은 생을 마감한 분들의 빈소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한, 죽음이라는 이생의 끝을 존재의 끝이라고 여기는 종교는 별로 없는 듯 하다.
현대 과학으로도 아직까지 증명하지 못했지만, 사후 존재의 연속성에 대한 믿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듯 하다. 그래서 우리는 증명되지 않은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으로 생을 마감하신 분의 명복을 아무 거리낌 없이 빌어 주는 것이다. 즉,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는 것과 같은 자연의 이치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인류는 사후 존재의 연속성에 대하여도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가까지 지내던 지인이건 또 그 지인과 가까이 지내던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건 간에 우리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이유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는 이유와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한 유한한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의 시 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도적적 합의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복제가 CD 복제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지기 전까지 우리와 모든 인류는 제한된 삶은 시간을 운명적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제한된 삶의 시간 안에서 각자가 소망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누구나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참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살아가면서 수 없이 되풀이 해 보지만 점심 메뉴 고르듯 간단하게 결론이 내려지는 것도 아닌 듯 하다.
이 쉽지 않은 질문이 장례식장에 들어서면 좀 더 쉽게 느껴지는 것이 꼭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먼저 장례식장을 방문하여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들의 슬픔은 고인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 준다.
이것은 고인이 이루었던 부나 명예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닌듯하며, 고인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사랑과 희생 그리고 삶을 통해 이루려고 했던 인간애를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또한 장례식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고인에 대한 회고의 대부분은 아마도 그분의 일상이 아니라 그분이 인간으로서 참으로 행하기 어려웠던 어떤 희생이나 사랑 그리고 노력 같은 것일 것이다.
즉,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고인이 냉면을 좋아하고, 흰색 옷을 좋아하였다는 회고 보다는,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한끼 식사로 고른 배를 채우며 행상을 하면서도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게 자식들을 키워왔다는 참 가슴 뭉클한 기억을 더 많이 하는 것이다.
한 인간이 돌보아 줄 사람 없이 스스로의 안위(安慰)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삶 동안 얼마나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행복은 과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행하여진 희생으로 얻는 기쁨 보다 더할 수 있을까?
아마 우리들은 이 질문에 대하여 모두 비슷한 결론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꼭 가야 하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죄송한 마음을 짧은 글로나마 자위하고자 한다.
신항우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미국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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