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은숙사모(낙원장로교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살갗 위에 살랑거린다. 아, 이제 가을의 시작인가보다. 올 여름은 유난히 숨차고 무덥고 뜨거웠습니다. 폭염 같은 더위를 뚫고 온 가을은 그래서 더욱 반가운 손님입니다. 정오의 가을 햇살이 나무숲을 가르고 단풍잎을 물들이기 시작하는 광경은 마냥 신비스럽기만 합니다. 어떤 손길이 이토록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단풍잎을 통해, 스치는 바람을 통해서도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이사야 43장을 묵상하다가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이 친히 나를 지명하여 내 이름을 부르며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여 주시는데 너무나 감격하여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닙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나요. 신앙생활 잘하면 별 어려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고난의 파도에 휩쓸리게 되면서 마음에 걸리는 거인처럼 느껴지는 문제들과 씨름하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인생은 항해하기가 좋은 항상 잔잔하고 고요한 바다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갈등의 파도는 일렁입니다. 서로 일치하지 못함으로 인해 고통과 상처의 폭풍이 무시로 몰아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때로는 혼자만 남고, 때로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 웃음 뒤엔 남이 알지 못하는 눈물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때로는 할 말은 참 많은데 너무 참담해서 할 말을 잃을 때도 있었고, 가슴이 너무 허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나불거릴 때도 있습니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다 만난 다양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람, 감사한 사람, 내게 좋은 영향력을 미친 사람, 내게 힘이 되어주었던 사람...좋은 사람으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안다는 것이 뼈아픈, 천사를 가장한 교활한 사람도 기억합니다. 생활 속에서 행복의 실체를 보고 만질 수 있다면 그것이 떠나가기 전에 소중히 다룰텐데...행복은 언제나 떠나가면서 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탈무드에 인간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구별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검은 부분을 통해서만 사물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생은 어두운 곳을 통해 밝은 것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나는 고통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철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나의 눈을 열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의 그늘에 가려 잘 눈에 뜨이지 않던 사람들을 보게 하셨고, 나의 귀를 열어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절망과 싸우고 있는 자들, 약한 자들, 가난과 씨름하는 자들, 말 못할 고민을 몰래 숨긴 채 가슴앓이 하는 자들을 위로하게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날 성숙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고통을 통해 주님의 섬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고, 은혜를 깨닫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 때문에 때때로 마음이 황당하여 조급해지고 힘들어질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한다”고 내가 나에게 말합니다. 기다림은 끊긴 길 너머에 새로이 펼쳐져 있는 희망 같은 아름다운 길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기다림이 언제나 희망적인 것은 아니어서 기다리고 다시 기다린다는 것이 피를 말리는 듯한 고통일 때도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으로 다져져 기다림마저 사랑하게 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인 것 같습니다.
상품의 질이 좋은 포도주는 어둡고 서늘한 곳에서 오랫동안 숙성해야 짙은 향기를 냅니다. 오래된 만남, 오래된 사랑, 오래된 정...오랜 세월이 아니면 결단코 빚어낼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오래된 것을 버리거나 잃으면, 오랜 세월이 빚어 낸 내 모습을 버리는 것입니다. 지난 세월의 자기 인생을 잃는 것입니다. 결코 과거에 집착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를 두려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그리고 내일은 바로 지나간 시간들의 열매이기에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도 소망을 가지고 오랫동안 고난의 긴 터널을 통과한 사람들에게도 짙은 향기가 있습니다. 가까이 할수록 그 향기가 사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마음이 슬픈 자들에게 위로와 새로운 힘을 돋우어 줍니다. 바람 부는 어두운 밤에 깊은 교훈을 얻게 도와줍니다. 그들은 절망의 끝자락에 보석처럼 매달려 있는 희망 같은 존재입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기억해 줄까? 26년 함께 살아온 남편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해 줄까? 내 자녀들은 나를 어떤 엄마로 기억할까?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눈 빛 하나로, 한 마디 말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연약한 부분까지도 감싸 주고 부족함을 채워 주신 믿음의 가족들에게 고백합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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