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기고
▶ 고세곤 /메릴랜드 거주 .전 구국향군 부사령관
군의 민주화 투쟁
1972년 뉴욕의 삼복정에서 ‘재미 구국향군’을 창설했다. 사령관 최석남(육사 2기), 부사령관 장석윤(육사 11기), 참모장 고세곤(육사 15기), 김장오 박사(보스턴), 최명상(시카고), 최장길(버지니아)로 조직을 갖추었다. 예비역 장교 7명은 뉴욕의 유엔본부 앞 하마슐드 광장에서 군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데모를 했다.
최석남은 문필가요, 역사작가요, 이순신 연구로는 1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구국향군보’를 15년이나 발행하여 문서로도 투쟁했다. 우리는 임창영 박사와 재일한민통과도 긴밀히 협력하여 정보교환, 방문교환도 있었다.
우리의 주목표는 군의 민주화요, 작전 1호 사업은 텍사스에 있는 한국 파견부대 방문이었다. 민주 장병을 위로한 것이 화근이 되었고 본국의 군 내부까지 이 소식이 번졌다. 해병대에도 민주동지를 확보했다. 한신 대장과 김재규는 뉴욕의 최석남 사령관을 만나서 동기생의 우정으로 설득하다 허탕치고 귀국했다. 군의 민주화운동은 김형일 장군이 3.15 부정선거를 반대한 것이 시작이었다. 민주당 정권에서 김 장군은 육군의 제2인자로 올랐다.
워싱턴의 자유언론
1970년 초는 관제 언론과 민주 언론이 첨예하게 대결했다. ‘자유공화국’(장석남 발행)은 반정부 민주통일의 기치를 앞세워 민주투쟁의 전방에 나섰다. 신대식과 강영채(영문 담당)가 병든 인식을 바꾸고 부패 권력에 항쟁하는 노력을 했다. 경제난으로 폐간한 것이 안타깝다.
또 하나의 민주신문으로 ‘한민신보’가 있었으며 대중지로 투쟁을 격려했다. 발행인 정기용은 학생운동,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추방되어 워싱턴에 거주했던 사람이다.
언론인이요 학자였던 최성일은 ‘Friends of Korean’이란 서클 조직을 운영했다. 워싱턴 ‘한민신보’의 논설위원으로 있다가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미국 인권기관과 언론에도 투고하고 투쟁한 사람이다. 케네디 상원의원과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한국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원한 사람이다.
1977년 3월초 최덕신 장군이 일본 동경의 ‘한민통’에서 망명을 선언했다. 이것은 김형욱에 이어 군인 출신 망명 2호였다. 선언내용으로 유신정권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서울은 벌집을 쑤신 듯 발칵 뒤집혔다.
동경 선언 후 미국에 돌아온 최덕신은 외로웠다. 우리는 인권투쟁의 선상에서 조직으로 ‘재미 한국인권투쟁위원회’(의장 고세곤)의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노정객 최덕신을 고문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이어서 최덕신 망명 강연회를 열게 되었다.
강연은 1977년 3월15일 메릴랜드 위튼의 굿 카운슬 하이스쿨 강당에서 열렸다. 한국 대사관은 강연을 취소코자 노력했지만 우리 동지 김준곤, 서유웅, 하경남, 김동진이 전력을 다해 모임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100여 명의 동포가 나와 민주투쟁을 성원해주었다. 반정부 근처도 안 오던 사람들에게는 민주정신을 보여주었다.
고세곤 /메릴랜드 거주 .전 구국향군 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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