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과 나라로 탄생하게 된 것은 이집트에서 탈출하면서부터다. 주전 13세기 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모세가 자기 백성을 노예생활에서 구출한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과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야훼 혹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구하는 과정이 특기할 만하다.
이집트의 바로(파라오)가 순순히 노예를 풀어주지 않자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의 갖은 재앙을 이집트에 내린다. 드디어는 열 번째 재앙으로 이집트 전역에 걸쳐 처음 난 아기들을 모두 죽게 한다. 처음 난 아기뿐 아니라 가축도 짐승도 모두 죽게 되는 재앙이다. 바로의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씨를 말린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건 참으로 대단하다. 그리고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뒤쫓던 이집트의 수많은 병사들은 홍해에서 익사하고 만다.
그리고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거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거기 살고 있던 팔레스틴 사람들과 싸워 정복해야 했다. 그 싸움의 잔인함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하나님이 ‘택하고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서 행한 이런 출애급과 가나안 정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걸까? ‘택함을 받지 못한 백성’은 희생되어도 괜찮은 건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하는 구절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옛날에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했을 때 이긴 나라의 신이 진 나라의 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극히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다. 이런 부족신(tribal god)의 개념이 팽배하던 주전 586년 유대인들은 바빌론(지금의 이라크)에 망해서 포로로 끌려가는 운명을 맞는다. 이런 엄청난 역사적 여건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을 택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개념에 한계를 느낀다. 뿐만 아니라 이웃 누구의 신보다 강한 신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드디어 보편신(universal god)의 신관으로 발전시킨다.
생각해보면 이는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다. ‘이방신’을 섬기던 바빌론에게까지 무참하게 쓰러지고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어제의 승자를 향해 우리의 신이 너희의 신보다 강할 뿐 아니라 온 세상의 하늘과 땅도 만들었다고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부족신과 보편신에 관한 서로 다른 성경구절을 어떻게 읽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를 그런 식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이고 시대에 따라 변천된 그들의 신관이었다.
우리는 혹시 수천년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도 ‘방향 수정’한 신관 을 붙들고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되새겨볼 일이다.
이 지 교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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